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 예수님, 어떻게 오실 거지요?

2009-12-0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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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이란 한 마디로 ‘가치’의 전환이다. 삶의 목표가 세상 쪽이냐,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 쪽이냐에 따라 존재와 삶의 가치관은 결정된다. 세상 것은 눈으로 볼 수 있기에 많은 사람이 재물과 출세에 목숨을 거나, 천상의 것은 눈에 띄지 않기에 찾는 이가 적다.

맑고 깨끗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래서 삶의 복이요, 구원이다. 세상에 몸을 두고 살지만 천상의 가치를 향해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영이 열리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인간 가치의 최고봉이다. 신앙의 가치는 그래서 ‘진실과 사랑’이다.

어느 날 소매치기가 거리에서 한 여자의 지갑을 감쪽같이 훔쳤다. 그런데 불현듯 그 여자의 얼굴이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쳐다보니 그녀는 어렸을 때 고향 초등학교에서 나란히 앉아 공부하던 바로 자기의 짝꿍이었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왔다. 지금까지 자기의 참다운 모습을 보지 못한 채 함부로 살아온 소매치기가 순진하고 정답던 옛 짝꿍을 보는 순간 자기의 흉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마침내 그는 가로등의 차가운 쇠기둥에 이마를 찧으며 “오 하느님, 제 자신이 정말 싫습니다”라고 울부짖으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는 소매치기의 삶을 청산한다. O. 헨리가 쓴 ‘소매치기’라는 단편소설의 줄거리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계절이다. 허나 기다리는 그 예수님은 2,000년 전처럼 말구유로 오신 것같이 오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하늘나라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우쭐대고 군림하고 싶어 자나깨나 섬김 받기만을 목말라하는 인간들의 마음 안으로 ‘섬기는’ 삶의 가치관이 되어 오신다는 말이다. 그분은 자기 이익과 아집에 목을 매고 아등바등하는 인간에게 함께 사는 이웃을 사랑하며 살도록 ‘가치관’을 전환시켜 주려고 오신다. 그래서 이기심으로 굳어진 인간의 돌심장 안에 사랑의 혈류를 흐르게 해 주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성탄’이 아닐까?

물이 흐르는 곳에 생명이 함께하듯, 사랑이 함께 있는 곳에는 생명과 기쁨이 함께한다. 그 기쁨 때문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 오지까지 가서 의료봉사도 하고 선교활동도 한다.

단연코 사랑은 남의 소중함을 인정하고 돌보는 ‘섬김’의 삶이다. 다른 이의 생명과 역할, 남의 생각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해 주는 것을 뜻한다. 남 위에 군림하지 않고 부족한 인간들의 나약함까지 서로 안고 가는 삶의 겸손함이 바로 이웃에 대한 진짜 섬김이요, 사랑이라는 소리다.

2,000년 전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은 사람은 없다. 그러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둘 다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마르코 2:22).

섬기는 ‘사랑’의 삶은 그래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거룩한 ‘예수 성탄’ 이후의 은총의 새 시대를 사는 모든 크리스천에게는 너무나도 가슴 벅찬 꿈이요, 소망이 아닐 수 없다. 사랑과 진실의 하느님은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또 한 번의 올 한 해 ‘예수 성탄’으로 우리 안에 임하실 것이기에 말이다.

김재동 <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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