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 천당, 천국 그리고 극락

2009-09-1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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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유년의 동심을 아름다운 서정으로 수놓았던 윤극영(1988년 작고)선생의 ‘반달’은 한국 최초의 창작 동요로 알려져 있다. 인용된 노랫말은 물론 그 첫 번째 절이다. 생전에 선생께서는 몰락한 양반 댁으로 시집간 선생의 누님이 고생 끝에 세상을 떠나자,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가까운 공원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 때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속에서 외로운 누님 같은 반달을 보고, 그 반달을 따라 흘러가는 시상에 곡을 붙인 것이 국민동요 ‘반달’이 되었다고 했다. 아무튼 선생께서는 돛대도 삿대도 없는 하얀 쪽배가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서 서쪽 나라로, 가기도 잘도 간다고 노래했다.

대체 샛별을 등대삼아 가라는 그 서쪽 나라는 어디일까. 아마도 그 곳은 더는 고통이 없는, 기쁨과 행복만이 가득한 이상향, 유토피아라 짐작된다. 그 이상향을, ‘즐거움만이 가득한 곳’으로 ‘지극히 즐거운 곳’으로 풀이되는 인도 산스크리트어 ‘sukhavati’를, 불교에서는 뜻옮김하여 ‘극락’이라 부른다. 극락세계는 우리가 속절없이 고통을 견디면서 살 수밖에 없는 세계인 이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은하계를 지나서야 도달할 수 있는 세계라고 한다.

극락은 불교인 모두가 꿈꾸는 사후에는 기필코 가야 할 이상 세계이며, 청정무구한 무염의 세계다. 찬연한 빛의 세계다. 사람들은 이 생이 다하여, 이 한 생만으로 자신이 완전히 소멸된다면 너무나 허망하고 억울한 일이기에, 다음 생을 기약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실 여부를 떠나 극락의 존재가 사실이기를 바라는 희구는 그러한 영생에 대한 절실함에서 기인한 것이며, 또한 그것은 현세의 시련을 헤쳐 나가는데 있어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락은 여기서 십만억 떨어져 있는 물리적 공간적 거리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심리적 거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극락과 같은 이상세계는 사후에만 도달 가능한 미래로 유예된 세계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경험 가능한 세계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극락은 청정한 사람에게는 여기에서도 가능한 공간이지만, 번뇌로 혼탁한 사람에게는 십만억 세계를 지나야 있는 아득히 먼 공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붓다처럼 한없는 평정과 선의, 무량한 자비심으로 살면 ‘지금, 여기’가 바로 극락이요, 붓다를 떠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여기가 지옥이 될 것이다.
지옥은 붓다처럼 사는 삶이 왠지 불편하고 껄끄러운 사람들을 위해 붓다께서 극진히(?) 배려한 장소라고 한다.

극락과 지옥에 대한 간명하고 적절한 교시가 있다. 중세기, 일본의 어느 노선사에게 한 젊은 무사가 찾아와 정말로 극락과 지옥이 있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선사께서는 다짜고짜 그 무사의 뺨을 한 대 후려쳤다. 화가 난 무사는 칼을 빼들고 그 선사를 베려 했다. 절명의 순간, 그 무사의 양미간을 가르는 선사의 벽력같은 소리. ‘잠깐! 그것이 바로 지옥일세.’ 젊은 무사는 칼을 거두고 선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노선사께서 나직이 밀어놓은 기별. ‘그래, 이것이 바로 극락일세.’


박재욱 (LA관음사 상임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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