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눔의 행복 - 추가된 감사목록

2009-09-0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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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저녁 식탁에서 식구들과 대화하던 중 대학생 큰 딸애가 질문을 불쑥 던졌습니다. “아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뭐라고 생각해?” 막상 답을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수많은 단어들이 머리에 떠올라서 그 중 어느 것을 골라 답해야 할 지 결정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랑? 용서? 화해? 나눔? 겸손? 회복? 평화?…’ 모두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손색이 없지만 뭔가 부족한 1%의 갈증이 있었습니다.

“글쎄, 그거 참 광범위한 질문인데?” 하고 얼버무리다가 평소 자녀들의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려울 때, 시간을 벌기 위해 자주 쓰는 비장의 무기인 ‘역질문 수법’을 썼습니다. “너는 뭐라고 생각하니?” “글쎄, 나도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지, 사랑인가? 근데 사랑도 뭔가 동기가 있어야지 생기는 것 아닌가? 무조건 사랑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둘째야! 넌 뭐라고 생각하냐?” “으이구! 대학생인 언니도 잘 모르는데 중딩인 내가 어떻게 알아? 근데 본질이 뭐야?”

이런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면서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두뇌작업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큰 딸의 “사랑에도 동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복잡했던 머리가 순간 환해지며, 불현듯 내가 찾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였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에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기술했듯이, 주어진 삶에 대한 감사야말로 어떤 원리보다 앞서는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출발점이 아닌가 싶다. 좋으냐, 나쁘냐는 일반적인 단순 평가를 넘어서, 자신의 삶의 환경을 주어진 그대로 감사할 수 있으면, 그리고 그런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이 단번에 해결된다. 그 감사가 이웃사랑으로 전환될 수도 있고, 감사하니까 겸손할 수 있고, 감사하니까 나누고, 감사하니까 행복하고, 감사하니까 불평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감사가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시작될 수 없지. 어떠냐? 그럴듯하지 않냐?”

“정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은데? 오! 그거 나쁘지 않은 답인 걸?” 이젠 다 컸다고 예전처럼 무조건 아빠를 추종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독립된 사고를 갖춘 인격체로서의 모습을 시위하는 딸애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는 슬그머니 뒤뜰로 나왔습니다.

리처드 스턴스 월드비전 회장은 지난 3월 발간된 자서전 ‘The Hole in the Gospel’(아직 한국어 번역판이 없음)에 자신의 월드비전 입성기를 기술한 바 있습니다. 책에는 최고 MBA과정인 UPENN 와튼스쿨을 졸업하고 세계적인 고급 주방용기 회사 Lenox사 회장으로 근무하면서 초호화 주택에 최고급 스포츠카를 즐기고, 저녁 식사비로 1,000달러를 지불하던 최고 상류층 인사가 어떻게 월드비전의 회장 청빙을 수락, 10분의1도 안 되는 봉급을 받고 평범한 2,000cc 세단을 몰고 이코노미 클래스 출장을 다니게 되었는지 상세하고, 감동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월드비전 수요채플 어느 날,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시엔 풍족하게 살며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 할 일을 다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월드비전 회장으로서 평범한 중류층으로 소위 내려앉았지만 저는 최고로 행복합니다. 감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입니다.”

“아빠! Thank you!” 그 날 이후 아이들로부터의 가장 많이 듣는 인사입니다. 그리고 나의 ‘감사목록’에는 새로운 감사가 추가되었습니다.


박준서 (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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