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에게 이웃은 있는가

2009-08-1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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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 정영휘(언론인)

한 40년쯤 된 것 같다. 초급장교 시절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 매일 아침 교실로 가는 도중 만나는 예쁜 아가씨로부터 미소 띤 인사를 받았다.

안면이 있는 사이도 아니요 업무상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닌데, 혹시 나에게 호감이라도 가진 게 아닐까? 상상은 자유라지만 어쨌든 하루 일과를 상쾌한 기분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60년대 초, 전쟁의 참화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동양의 작은 나라, 미국이 주는 잉여 농산물을 얻어먹고 사는 가난한 약소국의 한국 장교가 무슨 볼품이 있었겠는가.


다만 내가 외국에서 온 장교라는 것과 길가는 낯선 사람과도 쉽사리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생활문화가 그런 행동으로 표출됐을 터이다.

예전에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이웃사촌이라 하며 멀리 있는 친척보다 낫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도시에 사는 많은 사들은 ‘우리에게 이웃은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애경사(哀慶事)를 함께 하며, 급할 때는 형제보다 먼저 달려오던 이웃이 사라져 가는 걸 보며 사람들은 시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지금 우리는 이웃이 없는 이웃과 함께 살고 있다. ‘아파트 주민’ 하면 차갑고 인사성 없고, 이웃을 모르는 현대 도시인의 대명사처럼 여긴다.

한국 사람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대면이 어색하다. 조찬회나 세미나에 나가 보면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끼리도 서먹서먹해 하곤 한다. 옆 사람이 소개라도 시켜 주면 그제서야 마지못해 인사를 나누는 정도다.

특별히 도도하고 거만해서가 아니다. 새로운 사람과는 그저 쑥스럽고 어색한 것이다. 폐쇄된 농경사회에서 오랫동안 외집단(바깥사람)에 대한 경계심과 배타적 심리가 대물림한 결과라고나 할까. 표현을 자제하며 무게 있게 폼 잡는 군자의 도를 가르친 유교의 영향도 한몫을 하고 있음이다.

스코틀랜드에는 ‘친구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이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 옛날 중국의 어느 시인은 이웃을 ‘봄 동산의 따스한 볕과 같다’고 읊었다.


오늘날 우리가 농경시대의 이웃을 되찾을 순 없을지라도 인간사회의 기본 틀은 갖추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이웃은 있는가?’라고 묻기 전에 이웃을 만나면 미소 짓는 얼굴로 인사 나누기부터 해야겠다. 여기엔 자존심 같은 게 끼어들 필요가 없고 기득권이나 사회적 신분도 상관성이 없다.

오로지 나는 그들의 선량한 이웃이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애는 이웃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매일 마주치는 이웃집의 김 서방, 박 양과 개 닭 보듯 하면서 어찌 천만리 떨어진 유럽인이나 남미사람들과 인류애를 말할 수 있겠는가. 삶의 단면을 이웃보다 더 절실하게 나누는 집단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배타적이요, 남과 어울리지 못 한다는 부정적 DNA를 불식시키는 일을 ‘이웃과 친하게 지내기’로 부터 시작하자. 외국에 가서 삶을 누리는 경우, 국내에서도 외국인과 이웃하고 지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위에서 말한 이웃은 내 집과의 지리적 위치에서 바라본 이웃이다. 넓은 의미에서 이웃은 이런 저런 이유로 나를 알고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을 망라하는 개념이다.

이승을 살면서 억겁의 확률로 맺어진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안다면 어찌 감히 상대를 속이거나 배신행위를 자행할 수 있겠는가.

국가 경제력이 아무리 올라가고 한류열풍이 날로 상승기류를 탄다고 해도 인간의 기본양심에 바탕을 둔 도덕률과 이웃을 사랑라고 배려하는 마음자리를 갖추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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