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8.15 운동에 몸 바친 이탁 선생

2009-08-1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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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조(전 언론인)

8.15를 생각하면 으례 우리 민족의 비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국내외에서의 조국 해방운동과 자주 독립 광복운동을 연상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이역 상해에서 심신의 피로와 격무로 이 세상을 떠난 동우 이탁선생을 생각한다.
그는 어려서 엄격한 집안의 인간 윤리와 인(사랑)의 교육을 받고 10대에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삶으로써 참다운 이웃 사랑, 화평과 정의를 위해서 일생을 바친 혁명가로서 삶을 마친 인물이다.

국내와 우리의 옛 땅 간도와 북경, 상해 등지를 무대로 하여 교육사업, 무력항쟁, 정치활동 등 광범위한 활동을 하였다. 그 특징적인 사실을 열거하면 첫째, 민족계몽 교육사업-평남 성천, 개천군 인근에 소학교를 세워 올바른 민족관과 독립정신을 고취,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 계몽교육을 실시하였다. 둘째, 신흥 군관학교를 인수 운영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과 후일 중국 군관학교에 동포 청년들의 유학을 알선, 추천하여 항일 무장 독립군의 기초를 세웠다.
셋째, 항일 운동에서의 무력 투쟁-1910년대와 1920년대 초에 걸쳐서 광복단이라는 무력 단체를 조직, 직접 입안, 계획한 여러 차례의 국내 잠입, 무력 투쟁을 결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삼일 운동을 전후한 27명 결사대의 역족 암살사건, 독립 선언문 배포 등, 그리고 1920년대 초에 임정산하의 통일된 군사기관인 대한 광복군을 창설, 서울, 평양, 신의주, 선천 폭탄사건 등 여러 차례의 무력 항쟁을 이끌었다.


넷째, 삼일 운동의 촉성 역할-1918년 후반부터 국내외의 여러 동지들과 비밀리에 상호 연락, 만주 봉천에서 여러 차례 회합 후, 고종황제의 장례 때를 기하여 전국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키로 추진 실천하였다. 다섯째, 민족 단합을 위한 희생적 노력-망명 초기, 신, 구래 민간의 반목 해소를 위한 공리회, 부민단, 교민회와 한족회, 국민 대표 대회, 시사 촉진화, 농민 호조사 등의 간부로서의 활동, 및 재만 각 독립단체의 통일 운동의 분열 방지와 통합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 노력하였다. 여섯째, 한중 친교와 동포 보호를 위한 외교 활동-임시 정부의 동삼성(만주 전역) 외교 위원장, 한중 호조사의 이사, 대한 적십자사 감사, 중국 정부의 비밀 군사 고문 등, 그 외 중국 사회의 정치계 거물들과의 친교로 양 국민의 친선 및 동포 보호를 위한 적국적인 활동을 끊임없이 전
개하였다.

일곱째, 무슨 일에나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던 인물이다-어떠한 계획, 입안이나 공작을 위해서는 적극 몸소 추진하되, 그 공로와 명예는 동지들에게 돌아가게 하고, 자기의 명성을 탐낸 일이 추호도 없었다. 도산선생에 대한 평과 같이 자기의 명성을 내세움이 없고 겸손한 사람으로서, 당시 대립 상쟁하던 어느 파의 지도자들도 선생을 비난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산길을 하루 200여 리씩 걸을 만큼 장사 같은 분이었으며 그렇게 여러 차례 국경을 넘나들었으나 한 번도 왜군, 경에 체포되지 않았다고 한다.

도산선생은 “동우(이탁)는 일신이 도시의 의요, 담이었다. 그는 동지를 지극히 경애하고 무슨 일에나 저를 내 세우는 일이 없었다”고 평하였고, “장차 흥사단의 감독으로 청년 수양의 전형이 될 인물”이라고 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듣고 “왜 이렇게 좋은 동지가 가버리나”하고 탄식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의 하신 사업은 매우 크고 많으나 그의 업적이 비교적 알려진 바가 적고, 또한 8.15후에 나온 간행물이나 기사가 오기 또는 잘못 전해진 것이 많은데 이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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