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불신의 장벽

2009-08-0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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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50년간 의료봉사를 한 공적으로 의사의 최고영예인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로 되어 있던 저명한 보오그 박사는 정작 자신의 딸에게서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훌륭한 인도주의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늙어빠진 이기주의자” 라는 가혹한 비난을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보오그 박사는 50년 명예박사학위에 앞서 자신의 삶에 담겨있는 섭리를 깨닫고 자신 가족의 신뢰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각도로 사회를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불신감이 곳곳에 팽배해 있다.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재계, 교육계, 금융계, 의료계 심지어는 언론계까지 어느 한구석 신뢰감이 가는 곳이 없어 보인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가 이처럼 나라 전반에 만연되었다. 한국의 국회는 얼마전 미디어 법 통과와 관련해 또 한 번의 코미디를 연출했다. 그 처리과정에서 여야 국회의원들이 보여준 몸싸움은 미국 TV에 방영이 되었고 여성 앵커는 이것을 해설하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쌍용자동차 노사 간의 충돌, 교육노조의 시국선언, 언론노조의 미디어법 강행처리에 저항하는 모습들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신감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국민이 대통령의 발언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고 학생들이 스승의 말을 믿지 못하며 직원이 다니는 회사의 주인을 믿지 못한다면 이는 이미 희망이 없는 국가요, 학교요, 기업이다. 또 부부가 서로 믿지 못하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 불신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이는 이미 가족이 아니요 가정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불행이며 비극인가.


전문가들은 말한다. 사회의 불신풍조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반이 그 저변에서부터 흔들리면서 급기야는 국가마저도 통째로 붕괴될 수 있다고. 우리 사회에 이렇게 불신의 장벽이 높이 세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잘 이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권층의 의무’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의 본 뜻은 많은 혜택과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사회를 위해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책무가 있다는 말이다.
이 단어를 만들어낸 서구의 귀족들은 나름대로 그들 사회를 위해서 공헌한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미국에서도 이따금 불법, 편법행위로 걸려드는 사기꾼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이곳은 불신감으로 문제가 야기되는 일은 한국보다 많지 않다. 얼마 전 미국사회를 뒤흔들고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메이도프 사기사건은 정말 미국사회 전체를 경악케 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경제를 거덜 내고 마음을 다쳤는가. 불신감의 팽배는 공의로운 사람은 뒷전에 밀려나게 하고 자기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들만 활개를 치게 하여 사회 전반에 가치관의 붕괴, 도덕관의 상실을 가져온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무질서
와 혼란은 물론, 온갖 불법, 편법행위가 판을 치게 되어 있다. 불신감에서 파생되는 이기주의는 이웃의 고통을 모른 체하는 메마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한다.

지도자가 국민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기업주가 자기 이익만 챙기는 것은 이 사회를 점점 더 불안과 불신의 늪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지금 이곳 한인사회도 이미 어느 정도의 불신감이 싹튼 것은 사실이다. 타인이 하고 있는 가게 바로 옆에 동종 업소를 개업한다거나 한 푼, 두 푼 모은 곗돈을 가지고 도망을 친다든지, 아니면 취업을 해주겠다, 영주권을 내주겠다, 혹은 집을 짓거나 수리해준다는 명목으로 돈만 챙기고는 달아나는 파렴치한들, 이들이 생기면서 이제는 우리 한인사회도 점점 불신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유대인 커뮤니티는 새로 이민 오는 동족의 정착을 돕기 위해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 그런데 한인사회에는 갓 이민 온 한인들을 등쳐먹는 일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이역 땅에서 누구보다 더 반가워해야 할 한인이 한인만 보아도 겁이 난다는 말까지 생겨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스스로가 이 모든 불신감을 제거하고 밝은 사회, 깨끗한 세상을 만들려면 우선 정의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경우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정의를 아끼면 불법이 자란다”고 하였다. 불법이 성행하는 사회는 신뢰할 수 없는 사회이다. 불법이 기승을 부리는 사회는 불신의 장벽만 높아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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