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저래야 되고 저건 이래야 되고…” 한국에 가면 대통령에게 각종 주문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바로 택시 운전사들이다. 그들 말대로만 하면 당장이라도 나라가 바로 설 것 같다. 물론 그들의 정견은 단순히 서민 정서가 듬뿍 밴 푸념만은 아니다. 무언가 범상치 않은 갈증이 담겨 있다. 실제로 나는 왁자지껄한 대통령 선거 때마다 느낀다.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완전한 왕, 공평한 나라에 목말라 있는가를.
채워줄 대상이 없다면 욕구도 없다. 사춘기 소년의 이성에 대한 욕구부터 영생의 욕구, 신을 알고자 하는 욕구는 다 실체가 있어서다. 완전한 나라에 대한 갈망도 마찬가지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만드실 때 바로 이 나라에 대한 그림을 갖고 계셨다. 나라의 구성 요소는 주권과 국민, 영토다. 하나님은 왕의 주권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관계를 통해 자신과 인격적인 사랑을 나눌 백성을 원하셨다. 그래서 인간을 만들어 땅을 관리케 하시고 그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했다. 인간을 한낱 종이 아닌 한 나라의 국민으로 승격시키려는 배려였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에게는 굳이 주권이나 통치권이 행사될 이유가 없다.
선악과 금지 명령은 인간에게 자유의지의 ‘태엽’을 감아주는 것이자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권위 아래 살아야 한다는 법령 선포였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에 악과 고통이 들어올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기도 했다.
이 명령을 어겨도 아무런 해나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시험이 아니다.
사랑에는 모험이 따른다. 세상에 유입된 악과 고통의 존재 때문에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의심될 수는 없다. 인간에게 자신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신 하나임의 ‘의도적인 속박’, 그 속에 진짜 사랑이 있고 자유가 있다. 거기에 참된 하나님 나라가 있다. 애석하게도 첫 인간 아담은 온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이 자유의 시험에 넘어지고 만다.
한 국가의 주권은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으로 행사된다. 국민이 위법에 걸리자 곧바로 사법권이 발동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육체적인 죽음이 선고되었다. 그때부터 인간에게 질병과 사망이 찾아왔고,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냈다(창 3:17-19). 하나님 나라 역시 어렴풋한 모형들만 남긴 채 자취를 감췄다.
이후부터 줄곧 선악의 기준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 자신이었다. 이 인본적인 기준에서 수많은 철학과 종교가 나왔다. 자유와 평등 이슈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정치 실험의 주된 지렛대였고, ‘권선징악’은 고대 종교와 문학의 단골 테마였다. 급기야 포스트모던 시대, 절대 진리를 부인하고 상대주의 가치관을 외치는,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사 5:20) 하는 시대까지 맞게 된다.
당신이 태고적 한 사건의 역사성을 인정하든 않든 상관없다. 이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종속되어 있다는 증거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사람은 물속에서는 숨 쉬지 못한다. 100층에서 뛰어내리면 죽는다. 흙으로 지어진 몸은 흙에서 난 음식을 단 하루만 걸러도 기력이 쫙 빠진다.
한 국가의 국민은 주권을 존중하여 법을 잘 지킬 때 가장 안전하고 행복하다. 지상국가에서도 그럴진대 하나님 나라에서야 오죽하겠는가!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시 47:7).
안환균 <남가주사랑의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