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흑산도에 사는 사람들

2009-08-0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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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흑산도로 가는 뱃길은 검었다. 무엇이 뱃길마저 저토록 검은 색깔로 휘저어 놓았을까?선창에서 배를 타려는 사람들의 얼굴도 검었고, 이를 내려다보며 “꺼욱꺼욱” 울며 나르는 갈매기의 목소리도 검었다. 피난살이 어디서인가 본듯한 허름한 갈색의 봇짐을 부피로서 크게 보이며 배를 탄 한 노인만이 노래도 아닌데 노래 같기도 하고 타령도 아닌데 타령 같기도 한 가락 하나를 녹음된 테이프처럼 입 속에서 놓지 않고 계속 굴리며 흥얼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간단한 반주라도 곁들였다면 감추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를 그 가락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엮게 했었을 법한 그 조용한 흥얼거림. 그 흥얼거림이 내 귀에 도착을 했을 때 나는 그 흥얼거림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검다고 생각을 했다. 내 발길도 어느새 검게 무거워졌다.

흑산도는 처음부터 검은 유배지였다. 지금까지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다 죄 없이 유배 온 사람들이다. 궁한 유배지, 풍요를 지어낼 옥토도 없고 풍만을 꿈에 그려도 그 꿈조차 앉혀 둘 여유의 가슴이 흑산도는 없다. 그런 사람들 끼리 모여서 살기 때문인지, 남모르게 마주치는 눈동자의 초점과 오고가며 놓고 가는 위로의 하루살이 말이 서로서로 따뜻하기만 하면 된다. 특산품이라고 자랑하는 홍어는 날개 끝이 붉어서 붙여진 이름인데도 흑산도에서 잡히는 홍어는 검은색으로 포장한 흑갈색이다. 등도 검은색에 가까운 흑갈색이고 눈동자도 검다. 같은 시각에 잡은 타지의 홍어가 다 상해도 끝까지 버티면서 상하기를 거부하는 흑산도 홍어, 유배 온 사람들이 꺾기지 않는 절개로 그렇게 가르쳐 놓았을까? 곤히 잠든 흑산도의 주민들처럼 홍어의 꿈
도 검은 꿈을 꾸다가 깨어날 것이다. 흑산도에서 먹고사는 새들은 흑산도를 떠나 내륙으로 가지 않는다. 흑산도에 사는 사람들 때문일까? 원망 때문일까? 모두가 검다.


새들마저도 흑비둘기, 흑로, 검은머리쑥새, 쇠검은머리쑥새, 북방쇠검은머리쑥새 등. 그 검은색을 들고는 내륙으로 가려하지 않는다. 검은색의 비애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흑산도에 사는 사람들은 흑산도의 검은 흙 위를 걷고, 새들은 검은 하늘을 날고, 물고기들은 검은 바다를 헤엄친다. 그런 흑산도는 내륙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싶었다. 소외라는 것을 철저히 알기 때문이다.
1801년 순조 즉위 일년, 이조후기 면암 최익현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고, 천주학에 물들었다고 죄 없는 손암 정 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되어 소외의 땅인 흑산도에서 죽었으니 소외지란 대명사의 흑산도는 스스로 소외라는 단어를 지금도 씹고 있다.

소외당한 사람들은 단념이 무엇인지 알고 쉽게 포기할 줄을 알면서도 잊지 않는다. 권력구조의 부정을 잊지 않고, 편재된 생활경제를 잊지 않는다. 큰 무리의 주장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작은 무리의 주장도 옳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힘을 잊지 않고 삶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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