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손글씨가 가는 곳은?

2009-08-0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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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손글씨.지우개밥’ 낯선 말이 눈에 띄였다. 그러나 뜻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고 지우개밥이란 말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톱질할 때 쓸려 나오는 가루가 ‘톱밥’이니 ‘지우개밥’도 그럴 듯하다. 이 말들로 또 다른 이야기를 연상하게 되었다. 어느 대학교수의 놀라운 체험이다. 그는 대학생의 손글씨가 어색하여 할 말을 잃었단다. 그들이 컴퓨터 자판 두드리기에 익숙해지는 반면에 손글씨는 퇴보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글 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영어 필기체 역시 같은 영향권에 들어선 것이다. 타임 시사주간지가 이를 지적하였다. “컴퓨터. 인터넷을 통한 글쓰기가 일반화된 시대, 학교의 무관심, 실생활에서 활용 감소로 핸드 라이팅이 사라지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한글의 손글씨와 영어의 핸드 라이팅은 현재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이 원인은 한 마디로 시대의 흐름이다. 각 가정의 식품관리가 공장제품 사용으로, 각 가정의 재봉틀이 기성복 착용으로, 손빨래가 세탁기 사용으로, 부엌 아궁이는 개스 레인지로 자리가 바뀌는 것처럼 손글씨는 컴퓨터와 인터넷에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여기에 학교 교육이 손글씨 쓰기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글씨 모양보다는 철자가 옳고 그름에 치중하였다. 글 쓰기보다는 읽을 줄 아는 힘 기르기에 치중하였다. 어느새 글씨 쓰기는 기계화되었고 개성적인 손글씨는 별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손글씨는 사람의 품위를 나타낸다. 손글씨를 보면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말들도 지금은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글씨를 쓰면서 인격 도약의 방법으로 삼아 몸과 마음을 닦던 것도 옛일이 되어 버렸다. 글씨는 오직 의사 전달의 방법이고 손으로 쓰는 것보다 기계의 이용으로 더 빠르고 정확하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손뼉만 칠 일인가. 글씨는 본래 기능력만 있으면 되는 기호에 불과하였던가. 의문이 생긴다.이처럼 모든 것이 기계화 되어 가는 현상은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 로봇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앞으로의 세상을 로봇에게 맡긴다면 사람의 삶의 가치는 어디서 찾겠다는 것일까. 삶 자체를 기계에게 맡긴다면 사람은 무용지물이 아닌가. 모든 기계 발명이 사람이 하는 일을 빼앗는
다면 주객이 전도되어 중요성의 앞 뒤 차례가 바뀌고 말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하나의 지나친 제멋대로 하는 짐작이길 바란다.

한글을 가르칠 때, 읽기가 우선 이지만 쓰기에서 필순도 가르치고 싶었다. 그러나 요즈음 어린이들은 재빨리 제멋대로의 순서로 한글을 쓰는 일이 허다하다. 그들이 어차피 컴퓨터의 자판 두드리기에 익숙해지면서 필순이 시정될 것으로 본다. 또한 한글 예쁘게 단정하게 쓰는 것보다는, 철자법에 맞춰서 바르게 쓰는 것에 치중하게 된다. 그러니 한글 쓰기에서 보기 좋게 써야 한다는 차례는 자연히 자꾸 밀리게 된다. 그러다가 관심사에서 벗어난다.하지만 예쁘게 쓰는 연습을 시킬 수 있는 기회는 있다. 바로 서예시간이다. 벼루에 물을 붓고, 먹으로 갈아서, 묵향을 맡으며 한지에 한글을 써보게 하는 것이다. 시대에 맞지 않는 소위 고리타분한 생각일 지 모른다. 그러나 말없이 문화체험의 기회를 주어서 한글 예쁘게 쓰는 훈련이 되는 것으로 안다. 사라져 가는 것을 전통문화 체험으로 붙들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즉 예술로의 승화작업이며, 개성 함양의 기회이다.

미국에서는 유치원에서 인쇄체를 배우기 시작하여서 3학년이 되면 처음으로 필기체를 배우게 된다. 어린이들이 시작할 때는 필기체에 호기심을 갖지만, 점차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고 교사들이 말한다. 그래서 50년 후가 되면 필기체로 쓴 ‘독립 선언서’를 읽지 못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무엇이나 한쪽으로 쏠릴 때의 에너지는 놀랄만하다. 하지만 그 속도를 늦추려는 물줄기는 점점 힘이 약해지면서 하나의 억지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필기체와 컴퓨터나 인터넷의 기계화된 글씨 두 가지 다 살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나는 문화재로, 하나는 기능 우수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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