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당신도 의인(義人)이 될 수 있다

2009-07-2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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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CBS 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씨가 92세로 별세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를 평하여 “가장 불확실한 시대에 가장 확실한 말을 하여 국민의 믿음을 샀고 갈 길을 제시한 사람”이었다고 말하였다. 고 존슨 대통령은 “만일 내가 크롱카이트를 잃는다면 나는 미국의 중류층을 몽땅 잃는 것이다”고 평하였다. 신문기자와 방송인으로서 평생을 산 뉴스캐스터가 이런 어마어마한 평을 어
떻게 받을 수가 있었을까? 그 대답은 단순한 한 마디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본대로 보도하였기’ 때문이다. 진실한 양심의 소리를 따라 뉴스를 보도한 것이다.

유명한 그의 일화가 있다. 월남 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베트남에 다녀온 그는 고민에 빠졌다. 그 때만 해도 젊었던 그는 CBS 뉴스 국장인 리처드 세일런트 씨를 만나 고민을 털어놓았다. “제가 보기에 월남전은 미국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로 보도해도 되겠습니까?” 세일런트 국장의 대답이 곧 돌아왔다. “국민이 믿는 것은 방송국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오. 그러니 사실대로 소신을 따라 보도하면 될 것 아니오.” 그 인물에 그 상사가 있다. 두 사람 다 멋진 보도진이던 것이다.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 중 최고령인 네오폴드 잉글리트너(103세)씨가 지난 주 캘리포니아 무어파크 대학의 초청을 받고 휠체어에 앉은 채 말하였다. “젊은이들이여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일어나십시오. 언제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103세이지만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정의를 외치려고 합니다.”


한국의 전통적 윤리는 효(孝)에 기초를 두었고 미국 윤리의 초석은 정직이다. 그것은 양심의 소리를 따르는 진실함을 가리킨다. 과잉 광고는 불원간 드러나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다. 속임수는 며칠은 가지만 몇 년은 갈 수 없다. 그러나 진실은 처음에 불이익을 받는 것 같아도 마지막엔 이긴다.
성경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한다.(야고보서 1:22)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것이 모든 불의(不義)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사랑과도 통한다. 내가 아내에게 혹은 친구에게 얼마큼 정직한가는 자신이 잘 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은 그 정직만큼의 분량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다.

진실은 신앙과도 통한다. 하나님께 얼마큼 정직한가가 바로 내 신앙의 척도이다. 신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치 신이 내 곁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신앙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신을 향한 정직을 말하기 때문이다. 일에 정직한 것을 성실이라 말하고, 이웃에게 정직한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진리에 정직한 것을 정라고 하며, 아내나 남편에게 정직한
것을 정절이라 부르고, 신에게 정직한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동양인이 덕(德)이라고 부르는 말도 따지고 보면 정직의 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 의인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의인이란 선인 곧 착하게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행동하고 진실을 말하는 자를 가리킨다. 소위 예언자란 신의 뜻을 전달하고 진실을 추구한 사람들이었다. 예언자는 권력의 시녀가 되지 않고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폭력 앞에서도 양심을 굽히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뜻에서 누구나 의인이 될 수 있다. 2세들이 ‘한국인다움’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구수함’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숭늉의 맛 같다. 짜릿한 코카콜라 맛도 아니고 달콤한 포도주 맛도 아니다. 숭늉의 구수함은 가공되지 않은 맛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놓는 사람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싸우는 용기보다 사과하는 용기가 사람을 더 멋지게 만든다. 사과란 자기의 잘못과 약점을 솔직하고 용감하게 인정하는 것이므로 정직한 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과하지 못하는 배후에는 체면, 우월감, 자기 칭의(稱義) 등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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