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현대는 숫자놀음의 시대

2009-07-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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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철(목사/수필가)

현대를 가리켜 ‘숫자의 시대’라고 말한다. 모든 게 숫자로 환산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권 안에서 숫자가 온통 판을 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인 생활의 총아라 할 수 있는 컴퓨터가 시종일관 숫자놀음이다. 학생들에게는 학번이 있고, 군인들에게는 군번이 있고, 감옥의 죄수들에게는 죄수번호가 있으며 심지어는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제각기 고유번호가 있다. 주민등록번호, 여권번호, 지역번호, 우편번호, 전화번호 등등 숫자가 없다면 현대인은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수량화(數量化)’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숫자가 날로 천문학적으로 부풀어 가고 있다. 진보란 어제보다 더 많은 숫자를 쓰게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옛날이라고 해서 천문학적 숫자의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우리가 요즘 듣는 최고의 단위는 조(兆)이지만, 그것의 1만배를 경(京)이라고 했다. 영(0)을 48개 붙인 숫자를 옛사람들은 ‘극(極)’이라 했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보다 더 많은 수를 생각해 냈는데 ‘불가사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보다 더 큰 수에는 ‘무량(無量)’이 있고, 그보다 더 많은 수를 ‘대수(大數)’라 했다. 그것은 거의 ‘무한(無限)’에 가까운 수량의 세계를 뜻함인 것이다.


옛 사람들은 소수(小數) 이하에 대해서도 수많은 단위를 꾸며냈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소수점 이하의 단위로는 분(分), 리(厘), 모(毛) 정도이겠지만 그 밑으로 사(絲), 미(微), 녹(鹿), 애(埃) 등의 순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모호(摸糊)는 그보다 더 작은 수이며, 훨씬 더 밑으로 내려가면 찰나(刹那)가 있고, 공(空)이 있고, 허(虛)가 있다. 우리는 무(無)의 상황을 표현할 때 흔히 공허(空虛)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유(有)의 세계를 뜻한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미소한 수(數)에 ‘청(淸)’이 있고, 또 ‘정(淨)’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극에서 극으로 거의 무한하게 뻗쳐 있는 수열(數列) 속에서 쳐다보면 ‘만(萬)’이란 숫자는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淨)에서부터 대수(大數)에 이르기까지 수량의 세계를 토막낸 것은 무한 앞에서 유한의 세계가 얼마나 미소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유한의 세계에서는 만(萬)자란 역시 엄청 큰 숫자라 하겠다. 아무리 돈이 많은 미국이라 해도 전국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돈 중에서 1만 달러 짜리 지폐는 10만 장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 옛날 1923년엔가 독일에는 1천억 ‘마르’짜리 지폐가 있었다고 하며, 헝가리에는 1945년에 1천만 펭고짜리 지폐가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지폐를 본 사람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대한민국에서는 불과 몇일 전부터 5만원 권 지폐가 새로이 발행되어 통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고액권이 인풀레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경제학 보다는 심리학적 영역에 속하는 문제가 아닐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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