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폴로 11호 발사 … 그날

2009-07-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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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 (센트럴 커네티컷 주립대학교 경제학 교수)

벌써 40년이 되었다. 무더운 여름철이었지만 7월20일은 온 인류가 TV 앞에서 장시간 미국의 닐 암스트롱과 애드윈 올드린 두 우주비행사의 첫번 달 나라 착륙에 성공한 것을 목격하던 날이다. 셋째인 마이클 콜린스 우주비행사는 달의 공전궤도를 돌면서 착륙한 두사람의 복귀를 기다리는 구실을 담당하여 마침내 ‘아폴로 제 11호’가 무사히 돌아온 임무를 완수했었다.이것은 1903년 12월 17일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키티 호크’근방에서 라이트 두 형제(오빌과
윌버)가 처음으로 만든 비행기가 공중을 날아갈 수 있는 사실을 성취하기 시작한 역사적 기념에서 꼭 66년째 되는 쾌거이다.

이에 앞서 1957년 소련의 ‘스포트닉크’의 발사로 우주시대가 개막되어 미국과 소련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의 우주개발을 촉진하여 미국 우주비행사를 달 나라에 보내고 무사히 귀환시키는 방안을 제안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다시 존슨 대통령이 계속 밀어주었고 드디어 닉슨 대통령이 달에 착륙한 우주비행사에게 직접 축하 전화를 했었다.1969년 7월 16일 새벽에는 백만 명이 모여 직접 ‘아폴로 제 11호’의 발사를 목격하였으며,
관중속에는 존슨 대통령도 참석했었다. 나머지는 TV를 통하여 보았다. 12분 후에는 이미 궤도에 올랐고 3일간의 비행으로 달의 공전궤도에 진입하였다.
7월20일 오후 달 표면에 착륙하는 LM (달 착륙선)에서 달의 표면을 지켜보던 암스트롱 우주비행사는 그림과 꼭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운동경기를 TV에서 보는 것과 직접 관람하는 것과는 완연히 다른 것처럼 직접 보는 것은 의의가 크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두 가지 예기치 않았던 일이 생겼다. 달 표면에 가까히 갔을 때 컴퓨터의 과열로 잠시 포기까지 생각한 순간이 있었지만 NASA 본부에서는 계속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당초에 택한 착륙장소가 좀 깊숙하여 손으로 조종해서 약간 옮기는 작업을 암스트롱이 하였다. 원래 예정은 잠시 쉰 후에 달 착륙선의 문을 열고 내려가기로 했었는데 기다리지 말고 곧 나가겠다는 의견을 존중하였다고 한다.천지창조 이후 달의 표면을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밟은 암스토롱의 역사적 순간에 “나에게는 작은 첫 걸음이지만, 온 인류에게는 대약진의 첫 걸음”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지구보다 인력이 낮은 달 나라에서 캥거루같이 가볍게 걸어다니는 우주사의 모습은 마치 발레
춤을 추는 것을 방불케 하였다. 미국 국기를 꽂고 월석 (月石) 의 수집을 비롯한 온갖 임무를 수행하는 40년전의 기록이 새삼스럽다. 바다에 무사 착륙한 우주선에서 처음으로 달에서 왔기에 만약을 위한 세균을 염려하여 방역 (防疫)까지 거치는 철차도 있었다. 차후에는 그런 염려가 없었지만.

우주비행으로 시작한 기술의 진보는 각종위성의 발사로 여러가지 통신이 전 세계를 통하여 가능하게 되었고, ‘허불 우주망원경’은 우주의 생성과정까지 관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다시 말해서 냉전의 종식과 함께 각국이 협조한다면 인류에게 많은 혜택과 복지를 초래하는 각종 기술의 발전과 발견 등으로 행복한 삶의 질을 높이는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따라서 필자의 의견을 추가한다면 “각국의 국방예산은 인류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실 을 측
정하는 척도” 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모든 전쟁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그대신 아까운 생명을 죽였고, 과부와 고아, 피난민, 문화와 재산의 파괴, 부상자의 평생을 통한 고통, 그리고 한정된 경제적 자원의 낭비 등 소극적인 결과밖에 없었다.

달나라 착륙 제 40주년 기념날에 우리는 다시 한번 인류를 말살하는 핵무기의 경쟁적 생산을 지양하고, 전쟁보다 평화를 추궁하는 21세기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소망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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