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의 정치인들

2009-07-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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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로(베이사이드)

필자가 13세의 나이(1958년)로 홀로 객지생활을 하면서 주경야독하던 5-6년차 때다. 한달여동안 자취생활의 문간방도 찾아들지 못하고 현장생활 하면서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 철책선 지키던 GOP의 군복무를 마치고 학부를 졸업하고는 교육현장에 몸담았다. 때마침 정부는 중. 단기 경제발전계획을 추진 중이었으며 그 일환으로 중화학 공업 발전 방안 등 각 분야별 인력수급에 필요한 육성교육이 급선무였다.

당시 대안적 교육계획 목표로 볼 때 절대부족의 기술기능 인력난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토목건축분야와 공산품 생산에 투입될 기계기술 기능공의 육성이 시급했다. 하여 필자는 교육이념에 따라 시대가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자 어떻게 지도하면 이론과 실기를 겸한 기계기술 기능공 육성에 보다 효과적이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까 온갖 열을 다 올렸었다. 또 한때는 기술기능인 해외송출을 위한 주요업무를 감당한 예도 있었다. 국가경제개발 5개년 계획 사업추진과 공
산품 수출로 각 사업장마다 하루 24시간을 2교대 3교대 정신없이 일해야만 했다. 그 무렵 치열했던 월남전은 막바지 고비에서 종전의 기미가 보였으며 때를 같이하여 빠르게는 서독에 간호원과 광부 송출을 시작으로 하여 건설 붐이 한창인 중동아시아 국가에는 건설기술 기능공과 간호사 송출, 아프리카에는 중장비 운전사와 정비사 송출을 했으며 남미에 농업이민 파송 등 그야말로 온 국민이 외화벌이에 여념이 없었다.

그 한때는 순 건설기능공만 임기 마치고 귀국하는 인원이 하루 1500명이 넘는 날도 있었으니 가히 짐작이 갈 것이라 본다. 결과적으로 외화획득은 얼마나 되었으며 외국으로부터 차관도입 하는데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느냐다. 이로써 국가경제 계획 발전을 비롯, 그 많이 벌렸던 국가사업들을 차질 없이 추진 성공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또한 그 시절 열심히 삶을 영위한 사람이라면 상당수가 나와 비슷하거나 같았을 것으로 보며 바로 이때가 조국 대한민국이 지구촌 국가들 중 10위권에 진입되었음이 직접적인 근원이라 확신하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인들을 보면 필자와 동년배로서 과연 “그때 그 시절 땀흘려 일해 보았느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한심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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