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사의 신이 묻고 있다

2009-07-0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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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춘기(골동품복원가)

나의 골동품 복원 작업을 위해 스튜디오에 종종 찾아오는 노신사는 나의 고객 가운데 드물게 보는 베트남인이다. 그는 수집물량에 연연하는 골동수집가 이상의 골동수용가였다. 수집은 머리로 하고 수용은 가슴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자는 속물에 속한다. 그에게 또 하나의 별난 점이 있다. 한국도자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것이 고려청자나 조선백자가 아니라 분청사기이다. 일본을 통일시키고 대장군이 된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비천한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한 잔인한 콤플렉스의 소유자다. 황실귀족들을 미치게 하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에서 풍기는 귀족냄새를 히데요시는 무척 싫어했다. 이에 대한 반사근성에서 그는 분청사기를 택했다. 자연적이고 서민적인 분청사기는 히데요시 자신의 신분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사기그릇이 아닌가!

대장군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분청사기의 가치를 극대화시켜 나갔다. 대규모 다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다기(찻잔)품평회가 겸해지고 유명학자, 승려들은 앞다투어 오만가지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분청사기를 명품으로 극상시켰다.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그렇다 해서 무시할 수도 없는 귀족에 대한 열등의식을 여타 귀족 도자기(고려청자. 조선백자 등)를 앞지르며 명품도자기로 변신해 가는 분청사기를 지켜보면서 대장군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만족했다. 언젠가 노신사 베트남인(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다. 간단한 작업을 마치고 거실에 진열되어 있는 골동품을 구경하였다. 상당수의 한국 골동자기가 자리를 빛내주고 있다.


역시 주인의 취향에 걸맞게 분청사기찻잔에 차를 대접받고 일어서 나오는데 벽면에 걸려있는 인물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에 다가갔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별이 선명한 장군복장의 집주인 사진이다. 나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분명히 내 등뒤에서 같이 이 사진을 보고있을 월남육군장군 출신 집주인은 아무 말이 없다. 이상한 무거움이 실린 침묵이 흐른다.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나를 배웅하던 집주인이 등뒤에서 한마디 던진다. “한국은 언제나 통일되느냐? 베트남은 하나가 되었는데...”하고 물었다 해서 꼭 답을 구하는 그런 질문이 아니다. 나는 스튜디오에 돌아와 파이프에 타바코를 넣고 소시랑으로 담배를 다지면서 생각에 잠겼다. 만일 그가 대답을 구한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가! 그 보다도 월남장군 출신 집주인의 진의가 더 알 수 없고 궁금했다.

나는 베트남 근현대사를 읽은 바 있다. 20세기 식민지쟁탈이라는 제국주의적 논리 속에서 남 중국해를 해안선으로 하고 라오스, 미얀마,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차지한다는 것은 바로 동남아를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일본→중국→영국→프랑스→ 미국으로 이어지는 베트남민족의 반식민 독립투쟁사는 한마디로 피와 눈물 그 자체이다. 월남전도 망각 속에 잊혀져가고 있다. 공산 무력통일국가 베트남수상이 국빈으로 워싱턴을 방문하고 베트남 군 수뇌부가 서울을 친선방문한 지 오래다. 처참하게 패배 도주하여 뉴욕에 와 있는 전 월남육군장군이 “한국은 언제 통일하느냐”고 묻고 있
다. 이것은 역사의 신이 한민족에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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