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람

2009-07-0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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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한국이나 중국에는 바람에 대한 종류와 비유가 많다. 대체로 바람은 자연현상에서 일어나는 미풍이라던가 강풍, 또는 태풍이라는 바람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말하는 바람은 수없이 많은 실상의 바람일 뿐만 아니라, 직관을 슬쩍 피해 상스럽지 않게 표현하는 비유의 바람이 많다. 중국의 바람은 억지바람이 많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여러 종류의 괴상한 바람은 중국의 엉터리 헛 바람들이다. 그러나 한국의 바람은 자연의 바람과 인생살이에서 오는 사건을 절묘하게 비유하는 해학의 바람이 많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거나 저며드는 봄바람, 가을바람, 겨울바람, 가는 바람, 오는 바람, 시샘바람, 솔바람, 갈마바람, 갈바람, 가만한 바람, 명주바람, 솔솔 바람, 산들바람, 건들바람, 마파람, 명지바람, 소소리바람, 강바람, 동풍,북풍, 남풍, 서풍 등. 또한 왠지는 모르지만 꽃에도 바람을 넣어지은 이름이 많다. 만주바람꽃, 너도바람꽃, 들바람꽃, 국화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바람풀잎꽃, 등등...그런가 하면 초등학교 교사를 상대로 하는 치마 바람, 외도를 두고 말하는 바람, 신바람, 계바람, 춤바람, 친구바람, 성령 바람, 유부녀의 바람, 유부남의 바람, 정치바람, 돈바람, 증권바람, 자유바람, 통합바람, 감원바람, 속옷바람, 팬티바람, 화투바람, 놀음바람, 등 등 등...


해학으로 쓰는 말에도 바람이 많아 “저 사람, 바람났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네” “친구 바람에 강남 가네” “술 바람에 체면만 날렸네” “무에 바람 들겠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미당 서정주의 시 자화상에서)” 등 등 등... 무엇을 하던지 툭하면 모두 바람으로 통하는 나라인지라 과히 한국은 예로부터 바람의 나라다.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 하늘을 나르는 새나 비행기, 바람에 흔들리고서야 진한 향기에 꽃을 피우는 야생화가 있는가 하면, 바람을 이용해서 소리를 내는 동서양의 악기들도 많다. 그러나 서양의 관악기와 한국의 악기는 그 근본이 다르다.

신라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대금, 중금, 소금의 삼 죽 악기는 대나무 잎새를 스치는 바람의 깊은 슬픔을 버리지 않고 섞어서 소리를 낸다. 삶이 바람과 같았고 인생 또한 바람과 같음을 깨닫고 산, 바람과 함께 일고 지는 나라가 한국이었고 한국 사람들이었다. 우리 이민자들은 모두 바람을 타고 이 땅에 왔다. 그렇다고 타향에서 마저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갈 것인가? 우리는 이 땅의 주인노릇을 하는 백인들보다 한 발 늦게 이 땅에 온 죄로 시시때때로 많은 구박을 받으며 억울하게 살다가, 또한 이들이 무슨 내용인지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더듬이 외국말로 중얼거리면서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갈 것인가? 삶에서 반복되는 이런 일들이 이민의 길인가 하고 바람처럼 그냥 가기만 할 것인가? 가만히 앉아서 호령만 하면서도 덧 힘이 생기고 부자가 되는 이들 앞에서 우리는 계속 노동만 하면서 밥이나 먹으며 밑에서 살다가 여윈 바람처럼 갈 것인가?

겨울이 온다. 기름 값이 턱없이 오르고 프로판 개스 값이 덩달아 신이 나서 오른 추운 겨울이 온다. 초겨울바람이 길을 가다가 내 발목을 잡는다. 예전 같으면 티끌 모아 태산이라 했지만 아무리 티끌을 모아도 보탬이 되지 않는 미국 땅의 이민생활, 허술한 계약서에 도장한번 흐릿하게 찍고 전세로 온 이민이지만 언제 전세를 빼라고 할지 모르는 불안한 다민족 사회구조에서 우리는 무엇을 힘을 삼아 난관에 대처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정신문화가 사라지고 종교적 정신이 사라지는 이 땅에서 그나마 가늘게 잔존하는 윤리와 도덕과 철학, 그리고 어려울수록 힘이 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바람처럼 믿다가 갈 것인가?

지나가던 겨울바람이 내 발목을 붙잡고 묻는다. 바람의 민족이고 바람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이니 무슨 바람이 불더라도 걱정은 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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