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건망증

2009-06-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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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길(수필가)

나는 어렸을 때 물건을 자주 잃어 버렸다. 그래서 어머니로 부터 호된 꾸중을 받곤 했다. 초등학교 때는 하얀 운동모자를 학교에 쓰고 다녔다. 등교시 교실에 들어가 먼저 모자를 벗어 책상설합에 넣고 보자기를 풀어 책을 넣었다. 하교시 종례가 끝나면 책만 보자기에 싸 챙기고 모자는 까마득히 잊고 집으로 가 또 혼쭐나게 야단 맞았다.나는 무슨 일을 하다가 다른 생각에 빠질 때가 자주 있다. 그 생각에 깊이 빠지면 내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고 넘길 때가 종종 있었다. 재미있는 책을 볼 때 누가 불러도 모르고 빠져있다가 야단 맞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집중력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어린애가 정신을
어디에 팔고 사느냐고 타박을 놓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 가방을 챙긴후 꼭 책상설합을 들여다 보는 것을 습관으로 삼기로 했다. 모임이나 놀이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 설 때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 습관이 되도록 애를 썼다. 언제나 수첩을 지니고 다니며 잊지 않도록 적었다. 학교에 가져 갈 물건, 숙제, 누구의 생일, 무슨 특별한 날이나 약속 등을 수첩에 적었다. 수첩에 적는 버릇은 훗날 머리에 떠 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메모해 두는 좋은 습관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나에게 글 쓰기의 시작이었다.
한국 군대에서는 강압에 의하여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것도 있다. 그 중의 한 가지가 호주머니와 관물 정돈이다. 바지 왼편 앞주머니에는 열쇠를, 오른 편 앞 주머니에는 지갑을 넣고 뒷 주머니에는 휴지나 손 수건을 넣고 다니는 것을 지금도 따라하고 있다. 책상 설합도 책크 북이나 귀중품을 넣어 두는 곳, 각종 빌이나 원고 디스크를 넣는 곳,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곳으로 나뉜다. 찾아야 할 물건을 헤매지 않고 찾는 시간절약의 이점이 있으나 찾을 물건이 제자리에 없을 때는 끔찍한 혼란으로 나를 흔들어 놓는다.

요즈음도 자동차나 사무실 열쇠를 잊어먹고 나가다가 돌아서는 일이 가끔씩 있었다. 전날 다른 곳에 놓아두고 잊은 경우나 옷을 바꿔입고 챙기지 못한 사태였다. 바꿔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하고 호주머니 내용물도 챙겨 두어야 안심이 되었다.우리는 살아가며 다른 이의 호의나 친절은 쉽게 잊어버리고 다른 이로 부터 받은 모욕이나 손해는 잊지 못하고 오래 담아 둔다. 세월이 흘러 탈색되어 가는 종이장처럼 다른 이로 부터 받은 상처나 아픔을 잊고 살 수 있다면 건망증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엊그제 일은 자주 잊어버리는데 어린시절의 일들이 비온 뒤 텃밭의 새싹 돋아나듯 하나씩 떠 오르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슬프거나 기쁘거나 지난 생각들을 되새김하는 특별한 존재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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