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아이들의 외침을 들어보셨나요?

2009-06-2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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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취재1부 부장대우)

“아빠엄마랑 미국 마켓에 가는 일도 너무 창피해요!” 미국에 온 뒤로는 마치 제가 부모님의 보호자가 된 것 같아요!” 교육기자로 오랜 기간 현장을 뛰어다니며 만난 수많은 한인 청소년들의 입에서 평소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불평들이다. 엉터리 발음은 고사하고 문법에도 맞지 않는 문장 구조로 어설프게 소위 ‘콩글리쉬’ 영어를 구사하는 부모와는 어디든 그다지 동행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담긴 외침이었다. 특히나 고학력자 부모를 둔 자녀들도 가방 끈이 상대적으로 짧은 부모를 둔 자녀들 못지않게 부모의 어설픈 영어실력에 대한 불만은 상당히 컸다. 심지어는 미국마켓 캐셔와 나누는 짧은 대화조차 듣고 있기 창피하다며 부모의 입을 막아선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어른들 입장에서는 이런 청소년들의 생각이나 태도를 타이르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혀 이해 못할 부분도 아니긴 하다. 실제로 지난 주 뉴욕시립대학 아시안 아메리칸 연구소와 아시안 아메리칸 가정&연합이 발표한 설문조사에서 아시안 이민자 가정 자녀의 49%가 부모의 영어 통역을 전담하고 있고 이들이 겪는 스트레스나 부담감이 상당히 큰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부모를 대신해 크고 작은 여러 분야의 일 처리에 직접 나서다보니 특히 공공업무나 교육문제 등에 있어서 부모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게 되는 장점도 있긴 하다. 그렇더라도 때로 자칫 오역이라도 해서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춘기 청소년들이 감당하기에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부모를 대신해 부모 아닌 부모의 역할을 오래하다 보니 존경심이나 존중감이 갈수록 줄어 언젠가는 부모를 무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를 때면 무섭기도 하다는 솔직한 그들의 고백에는 나름의 깊은 고뇌도 엿보인다. 물론 매번 자녀에게 영어 통번역을 의지하고 이민생활을 헤쳐 나가야 하는 부모의 속도 편치만
은 않을 터. 자녀에게 멋진 부모의 모습을 남겨주고 싶은 욕심도 마음뿐이고 어쩔 수 없이 기대야 하는 상황 속에서 부모의 마음도 수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얼마 전 성인영어교실에서 만난 한 한인 중년여성은 이민 온지 25년 만에 뒤늦게 용기를 내어 영어를 배우러 왔다며 수줍어했다. 청소년 자녀들의 솔직한 바람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부모보다는 매번 노력하며 배우려는 자세를 지닌 이런 부모의 모습일 것이다. 오늘은 부모들도 책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영어 기초문법책이라도 꺼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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