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동란 잊지 말자

2009-06-2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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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신(보스턴 6.25참전국가유공자회 회장)

6월은 온갖 초목들이 다투어 싱그러운 생의 신록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하지만 59년전 북한 공산군이 쳐들어와 처절했던 6.25동란을 회상하면 나는 이내 우울해진다. 300만 명이나 되는 동족상잔의 비극 안에 나의 아버지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싸운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피해도 엄청나 이 전쟁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북한의 인민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10만 대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삼일만에 점령할 때 우리 국군은 이를 격파할 무기가 없어서 휘발유를 넣은 맥주병을 껴안고 몸을 탱크에 던졌으니 그 처참한 영웅의 죽음을 누가 기억이나 할까! 숫적으로 불리한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고, 왜관, 다부동, 창녕, 영산, 마산, 포항 등 참혹한 방어전 중에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9.15 인천상륙작전은 간만조 등 여러 가지 조건으로 실현 불가능을 가능으로 성공시킨 쾌거였다. 이어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할 때 영천고개에서 교전이 있었는데 ‘죠’가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져서 “mom, mom”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내 귀에 들리고 있다.


전진하여 독립문광장에 이르렀을 때 잔연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는 중에 적군의 시체 약40구가 하나같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군복이 터질 것 같았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적십자 병원 뒤 언덕 밑으로 갔더니 100여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줄로 묶은 채 적군이 총살을 한 것으로 꿈같은 현장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0월 하순에는 중공군이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바람에 38선을 넘어 진군한 아군들이 적지 않게 적의 포로가 된 중에서도, 인천에서 서울로 잇는 국도는 네차례나 주인이 바뀌었다. 철의 삼각지(철원. 금성. 금화) 육박전, 특히 고성 전투는 작은 동산에 국군 500명이 공격하여 고지를 점령했을 때는 고작 36명만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콧등이 시큰했다.

이리하여 1953년 7월 27일 종전 아닌 휴전을 했을 때까지 국군전사자 15만7,530명, 미군 전사자 54,246명이었다. 아무 이해 관계가 없는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의 자유를 위해 크나큰 손실을 보면서도 도와준 미국은 진정으로 고마운 나라이다. 6.25전쟁은 세계 2차대전과 월남전쟁의 중간에 끼어있기 때문에 그 관심이 무디어져서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으로 불리웠지만, 한국이 잘 살게될 무렵부터 미국시민들은 스스로 ‘Forgotten no more’ ‘Freedom is not free’를 외치며 타운마다 경쟁이나 하듯 6.25참전기념비를 세우고 있는 가운데 특히 조지아주 콜럼버스 시에 있는 미육군 보병학교 내에 한국전쟁 전시관을 6월 19일 개관했고, 6.25전쟁휴전일(7월27일)을 국가 기념일로 정하려는 법안이 미하원에 제출된 것은 실로 고무적이다. 또한 6.25참전 기념행사를 각 타운마다 하고, 한인사회에서도 한인회를 비롯하여 한인재향군인회 등 각기 다른 여러 단체들이 기념행사를 많이 해 참가하기에 바쁘다.

미국은 6.25전쟁을 잊지않겠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멀리 고국을 바라보면 탄식이 나온다. 역사적인 6.25전쟁을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을 뿐더러 이를 아는 국민이 50%도 안 된다고 하니 걱정이고, 과거 10년 동안에 70억달러라는 막대한 돈을 북한에게 퍼주어 북한은 이를 핵과 미사일 만드는데 썼다니 6.25전몰 영혼들이 통곡할 것이다. 과거에 대해 무지한 자는 미래로부터도 버림을 받게 된다고 한다. 6.25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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