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의 추억

2009-06-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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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지금도 아버지의 추억과 함께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은 최루탄 연기 냄새다. 나의 학창시절의 서울 거리는 민주화를 부르짖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이 쏘아대는 최루탄 연기로 눈이 쓰리고 아팠던 때다. 학생들의 데모가 격렬하던 때 대학교는 몇 달이고 학교 문을 닫는 일이 많았다.
길고 긴 휴교를 하는 동안 나는 책 보따리를 싸 들고 충청북도 고향으로 향했고 시골의 개업의사인 아버지의 병원 일을 도우며 치열한 삶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마당에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장작불을 떼어 수술복을 펄펄 끓여 소독을 하였다. 아버지는 에어컨 시설도 없으니 찌는 더위에 가마솥에서 끓여낸 천근처럼 무거운 수술복을 겹겹이 껴입고 긴 시간 수술을 집도했다.

아버지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이 흘러내린다. 아날로그 시대의 의학시설의 척박한 환경이었다. 치료비를 지불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 중에는 보리쌀, 콩 등 곡식으로 가져온다. 곡식을 가져온 사람에게는 치료비가 얼마인지 계산조차 하지 않으니 무료진료나 다름이 없었다.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던, 원시적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아버지는 가난한 마을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도우면서 양육, 가정불화. 경제파탄 등 그들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에 내일처럼 상담역할도 도맡았다. 아버지는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했지만 인디언 부족의 추장이라는 말은 즐거워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지역발전과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도시로 떠나 공부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하여 사재를 보태어 중, 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아버지가 설립한 학교는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는 징검다리였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높이 나를 수 있는 비상의 날개를 달아주는 곳이었다. 이 학교는 수많은 성직자. 엔지니어. 법조인. 교육자. 정치인 등을 배출하였다.지난해 가을 고국에 들렸을 때 시골고향을 다녀왔다. 마을은 공장 건물과 높은 아파트 건물의 숲을 이룬 도시로 놀랍게 달라져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 살았던 장미꽃이 만발했던 집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버지가 개업하던 병원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식당이 들어서 있었다. 식당 유리문에는 돼지갈비, 낙지볶음, 흑염소 탕 등 메뉴가 붙어 도배를 하고 있다.

아버지가 지역개발의 프로젝트로 만든 저수지는 아버지가 열정을 쏟아 이룩한 일대의 업적이다. 이제 이 마을에는 진학을 포기하고 꿈의 날개를 접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설립한 학교와 저수지는 지역발전과 교육에 열정을 쏟았던 아버지의 무지개 같은 꿈이었다. 호수같이 맑고 깊은 눈과 수려한 외모를 지니셨던 아버지가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십 년이 넘는다.이제 이 생애에서 그분은 다시 만날 수 없다. 죽음은 냉혹한 칼로 삶과 죽음의 선을 그어놓지 않는가? 지구 반대편에서 최첨단 의학시설이 갖추어진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인디안 추장 같은 나의 아버지의 추억을 들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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