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혼 길에 서 있는 사람들

2009-06-1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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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세상에서 무엇을 꼭 해야 한다든지, 또한 이 땅을 언제 꼭 떠나야 한다든지 하는 계약서를 들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흔히 말하는 팔자 속에 바꿀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이 있는지는 몰라도 세상에 와서 무엇을 하든지, 언제 가든지, 그저 움직이며 왔다가 빈손으로 가면 된다.

이런 이치를 미리 알았더라면 누구나 한평생을 서서 일만하지 않고,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면서 편히 살아 왔을 것이다. 눈 붉혀 따져보거나 열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을 해 보아도 인생은 잡정(雜情)들의 간이역이었다. 잡정 만을 인생에다 보태면서 은거초지(隱居草地)를 향하여 걸어온 셈이다. 그것을 착각하여 나는 서정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고, 잡정을 가엾이 여기며 나를 위로해 준 사람을 친구라던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인생에는 계약서가 없으니 갚아야 할 일도 없고 지켜야 할 조항도 없는데 삶을 위조증명서로 장식한다.


그런 것이 모두 허망하게 느껴지는 날, 그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다는 빛바랜 증명서 한 장을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놓고 가면 된다. 그러면 산 자들은 죽은 자를 향하여 훈장을 짤랑짤랑 흔들 듯 미사여구를 늘어놓을 것이고, 그것이 우리들의 귀거래(歸去來)의 글귀인지도 모른다. 오는 길이 있으면 가는 길도 있고, 젊음이 있으면 노쇠도 있다. 산은 산에 그대로 있으되 강물은 흐르면서 사계절을 끌고 가며 산 색깔을 철 따라 바꾸어 놓고, 하늘은 그대로 있으되 해는 가다가다 아픈 다리 뻗으며 푸르렀던 하늘은 붉게 물들인다. 세월이다. 사람이 흙에서 온 탓에 흙으로 돌아가니 그때에 사람들 발밑에서 짓눌리던 산천이 바람소리를 내며 껄껄 웃는다. 황혼은 진다. 그러나 어둠이 깔리기 전의 황혼은 어디서나 아름답다. 황혼이 지천으로 뿌려대는 아름다운 빛을 우리말로 노을이라 부르기에 나는 그 노을을 노을(老乙)이라고 말하여 왔다.

젊음 다음에 오는 천간(天間)이 노쇠(老衰)이고 그 노쇠가 땅에 묻히기 전, 마지막으로 발하는 아름다운 광채가 노을(老乙)이라고 나는 늘 생각을 해 왔기 때문이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인생이 무엇이고 성공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땀 흘려 열심히 일을 하는 아들과 딸을 보면 아이들을 위해서 늘어놓을 시원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마음만 답답해진다. 인생살이란 후렴을 물려받아 윤창으로 가락을 엮어 가는 육자배기인가? 실망과 좌절, 이별과 슬픔, 아픔과 눈물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육자배기가 두들겨대는 뚝배기 같은 소리의 인생을
흉내낼 수는 없다.

노을이 두들겨대는 저 붉은 육자배기! 가슴 치는 저 붉은 소리가 산을 넘으면 세상은 어두워진다. 그러나 산 자들의 가슴 한쪽에는 파여진 웅덩이가 누구에게나 있어 그 웅덩이에 조금씩 떨구어 놓은 잔 노을이 있어 애처롭다. 그것이 기억이고 추억이다. 시간이 지나 원색이 퇴색되더라도 그것은 언젠가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또 불러야 하는 육자배기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윤창이기 때문이다. 왔다가 가는 단색의 운명이야 내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지만 노을의 색깔이 어떤 색깔이 되느냐 하는 것은 미리미리 선택을 할 수 있다. 먹구름에는 노을이 앉지 않는다. 노을이 들고 가는 색깔은 내용의 맑음과 더러움에 따라 아름다운 색깔과 더러움의 색깔이 된다. 그 기준은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주님의 말씀이고, 그 기준을 명확하게 하려고 매주 성당에 나가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배우는 것이다. 사는 동안 끊임없이 실천해야 할 일이 아닌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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