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 ‘홀딱벗고새’

2009-06-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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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이어서 나옹 선사(고려 말)께서는 예의 그 청산과 창공을 세워,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셨네.

허 허! 그것이 선사의 말씀처럼 그리 쉬운 일인가. 우리들이 태를 묻었던 그리운 강산, 그 땅의 지존을 사셨던 역대 ‘님’들의 대부분이 불행히도 그것들을 벗어 놓으시기가 억울해서, 청사에 길이 빛날 가문의 명예와 한 치 미련도 없이 맞바꿨던 애물인데, 하물며 우리 같은 무지렁이 민초들이야 일러 무삼하겠는가.

그래도 이 천진무구(?)하신 선사께서는 연습 삼아서라도 그냥 한번, 훨~훨 벗어놓고 살아보라 하시겠지.


더욱이 선사의 절창이 주는 충정어린 권면에 추임새를 넣듯, 애바삐 ‘홀딱’ 벗으라는 짓궂은 지청구가 매년 요맘때면 어김없이 한반도의 산야를 쫑알쫑알 치근댄다.

어느새 봄은 지고, 아직은 덜 여문 옅은 연두 빛 산하가 찬연한 오월의 태양 아래 눈이 시릴 즈음이면, 이 산, 저 산 골짜기의 웅숭깊은 숲 속에서 검은등뻐꾸기의 청아한, 어쩌면 방정맞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 새소리에 맞춰 모내기를 하지 않으면 그 해 농사의 때를 놓치게 된다고 해서 시골 농가의 일손들은 바빠진다.

그 새의 울음소리에 가만히 귀 기우려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카.카.카.코~’ 또는 ‘밥.만.먹.고~’로도 들린다고 하지만, 음계 상 그 소리는 ‘미.미.미.도’로 표현되는 4음절의 독특한 리듬과 말맛 때문에, 마치 ‘홀.딱.벗.고~ 홀.딱.벗.고~’라는 소리 같아, 사람들은 그 새를 ‘홀딱벗고새’ 또는 ‘홀딱새’라 부르기도 한다.

아무튼 새벽녘부터 밤까지 홀딱 벗자고 온 산을 그렇게 애잔하게 울어대는 것이, 꼭 첫날 밤 서방님 앞에서 옷고름도 못 풀고 급사한 새색시의 한이 걸린 듯하다.

기실 그 소리는 나옹 선사의 노래처럼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세상 부질없는 것들의 어디에도 탐착을 말고 홀딱 벗고 살아가라는 간곡한 주문일터.

그 새와 관련해 절집에서는, 스님들의 바랑에 묻어 전해져 오는 묵은 설화가 있다.

어느 날 열심히 수행하던 젊은 스님에게 운명처럼 한 여인이 나타난다. 그 여인은 일찍 불귀의 객이 된 남편의 천도를 위해 몇 날을 절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여인의 자태가 너무 아름다워 스님은 그만 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러면 그럴수록 스님은 출가자의 마땅한 본분을 되새기며 마음의 고삐를 죈다. 망념을 떨쳐내기 위해 입으로는 끊임없이 ‘사랑도 홀딱 벗고, 미련도 홀딱 벗고. 탐욕도 홀딱 벗고……’ 염불 외듯 해보지만, 한 번 일어난 연정의 불씨는 점점 거칠게 타올라 마음 밭을 새까맣게 태운다. 결국, 스님의 몸과 마음은 화풍병을 맞고 속절없이 흩어지고 만다.

그 후, 억장이 무너진 이 젊은 스님의 혼백은 ‘홀딱벗고새’로 환생하게 되고, 자신처럼 밥만 축내며 한 눈 팔지 말고, ‘홀.딱.벗.고~’ 수행해서 해탈하라고, 그렇게 애 마르게 울게 된 것이라 전한다.

아카시아꽃 향이 꽃바람의 끝자락을 물고 한창이다. 곧이어 여름이 훈풍에 영글어 가겠지. 훨~훨 벗어놓고 그 바람 따라, 그 길을 따라 나서볼 참이다.


박재욱(관음사 상임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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