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죽음

2009-06-1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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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우 (홈 아트 갤러리)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한 시인은 연극합창 속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야. 그러나 이미 태어난 뒤라면 젊어서 죽는 것이 최선이야.” 라고. 우리에게는 과연 태어날 권리도,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없는 것일까? 우리가 태어난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태어난 것이지 자력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과학기술과 의술은 한 생명을 부모의 뜻에 의해 태어나게 할 수도 있으며, 이미 태어난 생명을 부모와 의사의 합작으로 태어난 생명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에게 선택할 기해도 주지 않고 엄마의 뱃속에서 제거해 버린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 역시 신의 역할을 부모와 의사가 대신했다고는 볼 수 없다.

한 생명체를 가지고 삶을 영유하는 모든 생명체는 태어났다 사라지는 연속 속에 짧은 한 부분일 뿐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인간에게는 의식이 있기에 아이가 의식에 눈을 뜨면서 자기 자신이 아무런 상의나 허락을 받지도 않는 채 신비 그 자체인 우주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자기 자신이 자각을 하면서 가장 먼저 “엄마! 나는 어디서 태어났지?” 라고 철학적인 질문을 엄마에게 던진다.이런 질문에 엄마의 대답은 궁색하다. 우리아기 엄마 뱃속에서 배꼽으로 이 세상에 나왔단다. 배꼽으로 어떻게 내가 태어났지? 아이의 의문은 증폭 되며, 자라면서 우주에 태어나 삶을 영위하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가?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런 허락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마침내 허락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뿐이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모든 생물도 마찬가지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따름이다. 우리 인간은 그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서 혼란에 빠져 들고, 이 마음의 혼란은 호기심을 더욱더 자극한다, 삶이 축복 받아야 할 것인가,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것인가?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 다니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종교이다. 그렇거나 저렇거나. 우리의 현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을 불평 없이 살아가야만 한다. 죽음이란 슬픈 일이며 숙명이다. 누구나 이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삶이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 죽음을 떠나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 종교가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도 인간이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 하는데 있다고 본다.

다양한 죽음의 형태, ‘생노병사’ 태어나서 병들고 늙어서 죽는다. 타의에 의한 죽음, 사고, 범죄, 형벌, 지진, 전쟁, 그리고 자의에 의한 죽음, 자살 행위이다. 상상적인 위험이나 치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살하는 광란증(Maniacal), 우울증(Melancholy),강박증(Obsessive), 충동적인 자살, 사회적인 요인, 이기적인 자살, 이타적인 자살, 아노미성(Anomy)자살, 특히, 유명인들의 자살은 이 아미노성 자살이 많다. 유명인이기에 사회의 보상이
크면 클수록 욕망은 통제되지 못하고 견디기 어렵게 된다. 욕망과 야망은 만족을 모르며 달성될 수 없는 목표를 향한 경주와 같다,

아무런 즐거움이 될 수 없는 경주, 그 자체에 장애가 부딪친다면 경쟁은 더욱더 치열해지고 고통 또한 증가한다. 그런 조건에서 삶의 의욕이 어떻게? 약화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근 한국사회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는 유명인들의 자살을 개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사회학자,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종교인, 모두가 힘을 모아 유행병같이 번지고 있는 모방 자살 행위로 인한 제2, 제3의 희생자를? 막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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