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침묵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2009-06-0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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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수필가)

미국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통 장례식에 참석하면 고인에게 나쁜 추억보다 하나라도 위로하는 마음으로 고인에게 좋은 추억과 칭찬으로 애도의 표시를 한다고 한다.그런데 어떤 장례식에서 고인의 부인이 자식를 부르더니 “저기 누워 있는 분이 너의 아버지 맞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야 목사님께서 가끔은 설교 중에 반 우스개 소리로 했을 뿐인데 백
인 할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듣고 폭소를 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러자 목사님은 당황했고 어쩔 줄을 모르자 성도들은 오히려 웃으며 가셨으니 호상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듯 죽음은 침묵이고 모든 허물이 덮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어쩌다 한국에 가서 시댁, 친정 부모님 산소를 다니다 보면 죽음에도 층이 있음을 느낀다. 아니 살아서 자식농사, 사회농사를 잘 지은 사람의 묘는 언제나 주위가 싱그롭고 풍요러움을 느낀다 그렇지 못한 산소는 삭막
하다 못해 페허 직전의 분위기인데 누군지 산소 앞에서 서럽게 목을 놓고 우는 여인을 보고 무슨 사연인지 모르나 마음놓고 울자리 하나 없는 인생살이라는 것에 새삼 가슴이 아릿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고 죽음 앞에 목을 놓고 우는 사람이 결코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아니다. 제 설
음에 제 자존심에 그렇게 울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니체가 자신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 이유를 찾지못함을 안타까워 했듯이 슬픔도 자기 안에 미음도 자기안에서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고 슬퍼하는 듯 했다.


그렇듯 죽음은 태어나서 생의 최종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길인데 그 길 조차 내 마음데로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보면 조물주가 주어진 만큼 죽을 힘을 다해 살아주는 것도 생명을 주신 분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생사와 허물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분에게 마지막 가시는 길에 침묵으로 그 분에게 자유를 주는 것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파란만장한 인생, 어찌 슬픔과 억울함만 있겠는가. 그 슬픔도 억울함도 내가 보는 기준과 상대가 보는 기준이 서로 다르기에 옳고 그름의 판단은 세월이 흘러봐야 아는 것으로 사람의 생각으로 판가름할 수가 없다.
세상은 그래도 민심, 천심이라는 게 있고 인과 응보라는 것이 있어 그 시대의 역적이 나중에 충신이 되고 그 시절에 충신이 지금 역적이 되는 것은 손바닥 하나를 뒤집는 경우와 다를 바가 없다면 서뿔리 감정적으로 생각하거나 자기 기준으로 한 인생의 잘, 잘못을 평가할 문제는 아닐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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