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날로그 편지

2009-06-0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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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로 문서작성을 하고 웹 쇼핑을 하는 나에게서 아날로그 시대는 내 곁에서 멀리 떠나버리고 있다. 그런데 오랜만에 책장에서 의과대학시절의 해부학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책을 펼치니 척추 뼈, 울퉁불퉁한 근육, 피부의 심줄, 거미줄 같은 모세혈관까지 생동감 있게 인체 부위를 묘사한 그림들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처럼 경이롭다.책 속에는 수 없는 빨간 밑줄이 그어져 있다.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던 치열한 시간들의 흔적들이다.

해부학 실습실에서 시체(카데바)에 메스를 들이대며 실습을 하던 소름이 오싹한 공포 의 기억도 떠오른다 모든 나의 친구들이 눈부신 젊음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음산한 해부학 실습실에서 갇혀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종이 책들은 방향감각을 잃고 있던 나에게 사방으로 막혔던 길을 뚫어 주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다가 책갈피 속에 친구의 편지 속에 끼어있는 노란 은행잎을 발견하는 순간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텍스트 메시지를 주고받는 세상에 볼펜으로 눌러 쓴 종이 편지가 오히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 그럴까? 최근에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이 종이책에 도전하는 단말기(Kindle)를 내놓고 있다 다양한 기능으로 무장한 전자 책의 화려한 변신이다. 전통 활자 미디어인 종이 책과의 치열한 경쟁이다. 터지 스크린을 장착해 책을 읽으면서 화면에 밑줄을 긋거나 메모도 할 수 있다 가벼운 단말기를 들고 다니면 이동하는 어느 장소에서나 즉시 온라인에 서점에 접속해 전자 책을 구매하고 단말기에 내려 받는다.


25만 권이 넘는 전자 책과 베스트 셀러를 확보한 아마존은 문화 상품인 책을 돈벌이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전자 책은 돈을 내고 온 라인 서점에서 금방 내려 받을 수 있으나 소비자의 소유권이 아닌 접속권의 권리일 뿐이다 책방에서 종이 책을 사면 완전한 나의 것이 된다. 책갈피에 단풍잎도 끼워놓고 추억을 묻어놓을 수도 있다. 남에게 쉽게 빌려주기 힘든 전자 책은 사람들을 점점 더 외롭게 갈라놓는 이기적인 문화를 만들게 된다.킨들은 매일 새벽 4시에 독자들이 구독하는 신문들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 저널 등의 신문들을 자동으로 내려 받는다 킨들을 통해 전자종이신문의 독자의 수를 늘릴 수 있다는 희망도 있다

하지만 이른 새벽에 진한 커피를 마시며 이슬이 묻은 신문을 읽는 행복감과 숲 속의 나무를 원재료로 하는 종이신문의 나무향기를 맡을 수 없다. 전자매개체가 아무리 애를 써도 할 수 없는 것은 손으로 만져 느끼는 따뜻한 체온과 향기다.또 다른 예로 디지털 시계는 시, 분, 초로 시간을 잘라 시간을 표시하는 전광의 숫자들이 일분마다 도깨비불처럼 반짝인다. 재깍 재깍 소리를 내면서 바늘이 돌아가는 아날로그 시계는 규칙적으로 뛰는 사람의 심장박동처럼 소리처럼 들린다 또한 좌우로 움지기는 아날로그시계 추는 무겁고 나른하게 금속성 소리를 내며 시간의 흐름을 알려준다. 원래 우주의 질서와 법칙은 아날로그적이다. 전기밥솥으로 밥을 짓는 현대인들이 아궁이에 불을 때어 밥을 짓는 원시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디지털화된 생활 방식이 편리하지만 마법사처럼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폭주처럼 질주하는 디지털 혁명 시대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인지 모른다

디지털은 비정한 기계문명의 산물이다. 결국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대치 상태의 격전장은 충돌로 부서지고 다시 결합되지 않을까? 디지털 시대에 살면서도 책갈피 속에 끼어있는 아날로그 편지는 가슴이 찡한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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