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불황보다 무서운 경쟁

2009-05-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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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열(취재 1부 기자)


“다른 집에서는 모두 공짜로 주는 것 같던데 돈을 내라니요?” “저보고 밑지고 팔라는 겁니까. 정말 너무 하시네요.”
지난 주말 플러싱의 한 휴대폰 대리점에 고객과 점원 간에 한바탕 가격 흥정이 벌어졌다. 고객은 패밀리 플랜에 가입하는 3개의 셀폰 단말기를 공짜로 줄 것을 요구하고, 점원은 그렇게는 안되니 50달러만 달라며 한참동안 가격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결국 고객이 요구한 셀폰 단말기 대신 수년 전에 출시됐던 구형 단말기를 무료로 주는 것으로 결말이 났지만 고객과 점원의 표정 모두 어두웠다.
요즘 한인 점포들을 다니다 보면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는 광경이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휴대폰 가게는 물론 식당, 의류점, 여행사, 주점 등 업종을 막론하고 마진을 줄인 파격 할인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어떤 업소가 먼저 값을 내리면 경쟁 업주들은 이에 뒤질세라 더욱 큰 폭으로 내리는 등 제살깎기식 경쟁이 성행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한인 콜택시들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기본요금이 버스나 지하철 요금과 동일한 2달러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택시를 이용하는 고객들조차 고개를 내저으며 ‘너무 심하다’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상인들은 저마다 “불경기보다 더 무서운 게 출혈경쟁”이라며 “더구나 영세업소들에게는 치명타가 아닐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물론 장기 경기침체로 굳게 닫혀버린 고객들의 지갑을 더 열어 더 많은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업주들의 노력을 뭐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요즘같이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출혈 경쟁은 결국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는 일부 상인들의 마지막 탈출구까지 봉쇄한다는 점에서 더 큰 사회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앞선다.
플러싱에서 점포를 운영하는 K모씨는 “규모가 큰 업체들이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파니 장사가 안 되는 건 뻔한 일이 아니냐. 몇 개월 째 렌트를 못내 쫓겨날 직전에 있다”며 “파산 신청을 고려중에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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