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믿음 없는 자

2009-05-1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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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빈 교도소 심리학자
종교를 믿음이라 하고 종교를 믿는 사람을 신자라고 부른다. 종교에서는 신자는 믿음을 지키고 믿음을 굳건히 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신자는 또 믿지 않는 자를 신자로 만드는 일도 해야 한다. 그리하여 믿음은 종교의 기본이 되며 불신은 죄 중에서도 으뜸가는 죄라는 점을 종교에서는 항상 밝혀왔다.

거룩한 전쟁에 임하는 신정주의자는 그의 적은 불신자(infidel)라고 불러 그러한 적을 쳐 죽이는 일을 그의 숭고한 임무라고 여기고 나간다. 무엇이나 잘 믿는 자를 아이와 같은 어수룩한 사람이라고 하는가 하면, 또 믿는 스타일이 이상하고 해괴해서 그 결과가 우리의 이해력이나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면 우리는 그러한 믿음을 광신이라고 부른다. 그런 것을 보면 믿음의 범위는 그렇게 좁지 않은 것 같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언어학자가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믿을 수가 없어서 각 언어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내용물을 일일이 자루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말할 때마다 그 해당물을 꺼내 보이며 말을 해야 하는 대목이 나온다. 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빵을 꺼내 보이며 하고 거북이에 대한 말을 할 때에는 거북이를 꺼내 보이며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언어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인간의 언어사용은 불가능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탁(trust)은행, 신용(credit)조합이라는 이름이 제시하듯 인간의 사업과 거래에 있어서도 믿음이 없으면 인간의 그러한 행사는 어려워진다. 믿음은 그러므로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을 막론하고 정상적인 인간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여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유별나게 믿음이 없는 자의 생활이 몹시 불편해지고 괴이해지는 점을 유의하여 심리학에서는 그러한 자를 ‘파라노이드’라고 불러 그의 정신에 질환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그러한 사람의 프로필을 한번 소개하려고 한다. 이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를 깎아 내리고 속일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하여 미리부터 항상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남의 말이나 외부의 영
향력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지기를 좋아하며 시비조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어서 타인의 비위를 잘 건드린다.

차갑고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다니며 유머를 그는 별로 즐기지 않는다. 겉으로는 무감각하고 객관적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다. 질투심과 샘이 많으며 작은 일에 기분을 상하고 화를 잘 낸다. 자기에게는 나쁜 성질이나 불순한 동기가 없다는 주장을 자주한다. 오히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결점을 타인에게서 찾아내는 소질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눈이 어둡고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하며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날카롭고 밝은 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의와 원칙이라는 말을 특별히 좋아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존심이 고귀한 것이라고 간주하며 매우 작은 일에도 자기의 자존심이 큰 손상을 입었다고 느낀다. 동시에 자기의 독립성과 고립성을 자부하며 자신의 그러한 개성과 지위와 자율력을 잃지 않을까 하는 깊은 공포심을 그는 항상 느끼고 있다. 그의 무의식 속에 깊이 심어진 과거의 어떤 해괴한 추억과 생각과 신념의 씨는 오랜 기간을 통하여 고질적인 괴벽으로 성장하고 그의 내면구조는 따라서 희한하게 생긴 딴딴한 돌덩어리와 같이 된다. 빈틈없고 견고하게 짜여진 그의 성벽은 절대에 가까워지며 수시로 변하는 환경적 사정에 타협과 적응을 하는 일이 점차로 불가능해진다. 그리하여 예기치 않은 큰 문제가 일어나면 외적으로 폭발을 하든지, 아니면 내적으로 좌절을 하여 결국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믿음 없는 자의 프로필이다. 우리의 현재 삶이 어렵고 불편하다면 그 까닭은 아마도 우리 중에 이와 같은 믿음 없는 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럴지 모르겠다. 그러나 믿음 있는 자들이 모여서 하는 교회가 그렇게 시끄럽고 어려운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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