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도(牛島)

2009-05-1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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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 시인

왜, 섬은 남쪽으로 갈수록 더 아름다울까? 기온이 따듯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섬의 마음이 따뜻하기 때문일까? 속옷마저 벗어버린 탓일까? 아니면 온통 주고 싶어서일까? 아마도 나는 남쪽의 따스한 기온이라기 보다도 섬의 마음이 따스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한라산 하나로 된 제주도도 세계 어디에다 내어놓아도 한 치의 손색없이 아름다운 섬인데 제주
도 남쪽 성산포에서 겨우 십 여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 우도는 한라산이 솟아오를 때 덤으로 생긴 섬인데도 제주도보다 아름답다. 아니 그윽하다는 말이 맞을는지도 모른다. 밭을 갈다 쉬는 소의 눈처럼 그윽하다.

그때의 하늘은 온통 소 눈에 들어와 논다. 무엇을 가지고 놀까? 소 눈 속에는 무엇이 있기에 하늘 한 조각이 들어와 멍텅구리 같은 큰 눈동자를 살살 굴리며 끔뻑거리게 하는 것일까?우도를 멀리서 보면 우도는 섬이 아니다. 동백을 묶어 바다에 띄어놓은 온통 동백의 묶음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소 섬(牛島)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보아도 소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진초록 잎새 사이에 동백의 핏물 고이는 소리만 들리는데 왜 소 섬(우도)이라고 심술을 부렸을까? .
우도의 바닷가를 거닐면 울고 싶어진다. 숨을 거둔 산호가 제 몸을 산산이 부셔 가루로 만든 후에 모래를 대신해서 해변가에 누어있는 우도의 백색해변, 우도의 해변을 걸으면 마냥 울고 싶어진다.


광물질의 돌가루가 아니라 한때를 살다가 간 저 많은 산호들의 기억과 흔적들을 발자국이 패이도록 밟으면서 오늘의 한 순간을 웃으며 걸어가는 연인 같은 사람들의 가벼운 발걸음, 산호가 보여주는 퇴색한 백색의 회한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웃으면서 손을 잡고 가는 나무랄 수 없는 다정한 저 두 사람을 대신해서 나는 무릎을 꿇고 엎디어 울고 싶어진다.
세월은 산호에게 무엇이었을까? 산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하필이면 왜 이 해변에 와서 온몸을 부시고 가루가 되었을까? 사랑은 덩어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루가 되는 희생이라고 흰 뼈 가루를 보여주며 가르쳐주는 교훈일까? 사랑에 즐거움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고, 사랑에 괴로움이 있다면 사랑을 팽개치는 용감한 이기적 사랑, 소 눈에 들어앉은 하늘을 껴안고 소섬(牛島)은 울고 있을 런지도 모른다. 몇 명되지 않는 우도의 주민들은 가난하여 달콤한 사랑이야기 따위를 우도의 돌 벽이나 산호가루가 깔린 눈부신 바닷가에 흘려놓을 겨를이 없다. 자식이 있으면 아침밥을 해 먹이면서 육지로 나가라고 되풀이되는 말을 하고 또 할 뿐이다.

자식을 정처 없이 떠나보내고 싶은 어머니가 어디 있겠느냐 만은 우도를 떠나 육지로 나가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집안에서는 경사요, 출세로 여기는 것이다. 가난 때문이다. 우도의 억센 나무들이나 풀잎들처럼 우도의 어머니들은 바닷바람에 거칠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지 않는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일터로 등을 떠다미는 아침햇살처럼 육지로 나가라고 자식들의 등을 떠다미는 입속말만 계속 할 뿐,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바닷물 깊은 곳 어디엔가 두고 가지 못할 그 무엇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편이기도 하고 자식이기도 하고 조상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 오랫동안 살아온 정이 바다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다가도 이따금씩 가슴을 치는
파도로 거칠게 일렁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기에 우도를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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