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워낭소리’를 듣고

2009-05-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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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길 (수필가)

‘워낭소리’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관람자들은 슬펐다든가 울었다든가, 여러가지 감상을 말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왜 저 할아버지는 저토록 고생을 하며 밭갈이 하고 있을까, 자식들은 없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왜 저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까.
밭 일구고, 논을 매고, 땔감을 해내고 하루 종일 새벽부터 일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한쪽 발을 절름거리며, 꽈배기 같이 꼬인 쇠잔한 몸으로 밭갈이도 하고, 엎드려 기어 다니며 김매는 모습은 정말 도를 닦는 고행 (苦行)의 길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열병을 앓다가도 다음날은 일어나서 밭으로 나가는 할아버지 모습은 처절한 수행의 본보기였다. 마흔살이 넘은 소는 자기 몸도 간수하기가 버거운데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르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장 보러 시내까지 태워서 다녀 오곤했다. 미련스럽지만 충직한 일꾼의 역활을 다 하고 있다.
소(牛)를 성스럽게 다룬 일화는 많다. 그리스의 신화에서 ‘제우스’가 소로 나타나고, 아플론은 목동으로, 또는 석가모니를 소로 비유하고 있다.
특히 십우도(十牛圖)라는 불화 (佛畵)에서는 소를 진리 혹은 불성(佛性)이라 하고, 소를 끄는 동자(童子)를 불도(佛道)의 수행자라고 했다. 할아버지의 소는 늙고 병들어 죽었다.


큰 구덩이에 파 묻었는데 봄이 되니 노란 꽃이 그 무덤에서 피어 올랐다. 노란꽃으로 소를 환생시켰다. 진리는 대상이 아니라 수행자 자신과 하나가 되어 되돌아 온다는 것을 작가는 보여 주려고 했음직 하다.모든 생물은 ‘팔자’가 어찌됐건, 죽게 마련이다. 오늘도 살려고 파득거리며 먹이를 주어먹고 있는 작은 고기를 큰 놈이 움쩍 삼켜버리는 바다 속의 생태를 보며 세상 만물들은 ‘살려고 먹고’ 있는데 결국은 ‘먹힐려고’ 이짓 저짓 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은 누구나 먹히게 되어 있다. 인간은 땅위에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아무거나 회쳐 먹고 구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또한, 우리 먹이를 낳고 키워준 땅, 그 흙 속으로 결국 먹히게 되는 인간 궁상(窮相)일 뿐이다.

잘 먹고 잘 산다고 죽지 않는 ‘불사조’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많은 재산 가지고 가서 지옥 입구에서 ‘사바사바’ 하면 천당행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다. 그러기에 영물(靈物)인 인간은 신앙을 통하여 또 다른 세계(眞我:Idea)를 찾으려고 한다. 워낭 소리에서 할아버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불타(佛陀)’와 같은 해탈의 고행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는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 ‘워낭’은 절간의 ‘풍경’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풍경(風磬:물고기)’- 그것이 밤낮 없이 수행자를 깨우치듯이 그 워낭은 그 할아버지의 수행의 촉매인 것이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성불(成佛)’할 것이다. 그의 침침한 눈은 열릴 것이며, 그의 혜안(慧眼)은 혼탁한 사회의 우리 모두에게 ‘등불‘이 될 것을 믿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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