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낯설게 하기

2009-05-1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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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마다 TV가 한 대밖에 없던 시절, 시골 대청마루에 모인 사람들이 레슬링 선수의 멋진 박치기 장면을 보며 “와!” 환호성을 지른다. 함박웃음 짓는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가족과 이웃의 행복도 함께 클로즈업한다. 90년대 말 한국 최초로 3D 애니메이션 기법이 사용된 ‘동네 TV’ 테마의 모 기업광고다. 그 ‘액자 속의 세상’은 완벽하게 아름답고 평화롭다.

이름만 불러도 살갑고도 정겨운 가족. 그 가족 공동체의 관계가 발전하여 사회가 되고 국가가 되고 세상이 된다. 사랑의 공동체로 뒤얽힌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하고, 일상 속의 자잘한 행복은 사랑의 감칠맛 때문에 눈물겹도록 쏠쏠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가 발견한 것이 있다. 왜 이 행복이 지속되지 못하는가. 왜 삶에는 꼭 ‘기-승-전-결’이 따라붙는가. 왜 원치 않는데도 사람은 차츰 늙고 병들어 끝내 죽어야 하는가. 한 꺼풀만 걷어내면 세상은 전혀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라고 느낀다면 우리가 어느새 ‘자연’이란 이름의 사이클에 너무도 익숙해지고 고분고분 세뇌된 탓일 뿐이다.

무언가 잘못되고 단단히 고장이 났다. 어딘가에는 결핍이 있다. 그 결핍으로 삶의 이곳저곳에 고통과 불행, 불평등이 들쭉날쭉하다. 개인의 삶에도 굴곡이 있지만, 개인 간, 국가 간에도 삶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미국인들이 매년 먹지 않고 버리는 음식만 430억달러어치다. 그들이 조금만 절제해도 아프리카는 더 이상 굶주리지 않는다. 인간의 이기심이 빚어내는 갖가지 부조리는 언뜻 주위를 돌아봐도 금세 눈에 띈다. 완전한 창조주 신이 있다면 왜 이렇게 세상이 불완전할까. 아니, 그는 도대체 세상을 돌아보기나 하는 것인가.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합 1:13-14).

하나님의 침묵, 이것은 단지 심판의 ‘잠정 유보’ 사인이다.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 차후에라도 최종 판결이 없다면 의롭고 완전한 하나님도 없다.
죄는 정상이 아니다. 당신이 화를 내거나 시기하거나 거짓말 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것은 병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다고 해도 병은 병이다. 어떤 병도 ‘자연스런’ 병은 없다.

그 죄의 질병은 죽음의 증상이기도 하다. 죄의 대가로 장차 맞을 죽음이 현재의 삶속에 이미 진행 중이라는 신호다. 왠지 공허하고 막연히 불안하다. ‘신이 정말 존재할까’ 하는 의문, 죽음 뒤에 무언가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길이 없다. 사람이 왜 죽는지 모르면 왜 사는지도 모른다. 문제를 문제로 못 느끼면 답을 찾을 수 없다.

문학에는 ‘낯설게 하기’가 있다. ‘일광욕하는 가구’ ‘정전된 하늘’은 익숙한 사물을 새롭게 보려는 표현이다. 죄나 죽음 또한 낯설게 여겨 보라. 죄를 ‘싫어하면서도 좋아한다’는 건 결코 범상치 않다. 멀쩡하던 육체가 한줌 흙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들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굴복해 온 ‘상식의 횡포’에 이제라도 과감히 태클을 걸어 보라. 그때부터 당신은 적어도 구원의 희망을 가질 자격만큼은 그 누구보다 확고해진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안환균 <남가주사랑의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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