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코리안의 DNA

2009-05-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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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 (언론인)


모처럼 조카들을 만나도 대화할 기회가 없다. 집안에 특별한 행사 같은 것이 없으면 따로 접촉할 기회가 없을 뿐 아니라 설혹 만난다고 해도 서로 의사소통이 되질 않으니, 인사 몇 마디 하고 나면 서로 사오정일 수밖에 없다. 이민 2세들의 생활상이라든가, 그들의 정신세계 내면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말이 통하질 않으니 벙어리 냉가슴이 되고 만다. 수십 년 전 배운 나의 영어실력으로는 그런 정도의 의사소통이 자유자재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영어 실력을 탓하기보다 실은 그들의 삶의 태도를 꾸중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들에게 한국말은 이미 모국어가 아니라 외국어가 되어버렸다는 게 나의 불만이다. 세계화 시대에 무슨
조선시대의 잠꼬대 같은 말씀이냐고 쌍심지를 돋울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언어란 그런 게 아니다. 인간에게 언어란 자기의 뿌리요, 아이덴티티이기 때문이다.

오렌지족이 아무리 용을 써도(껍질을 볏겨도) 백인이나 서양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한인 2세가 비록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제아무리 똑똑하다고 할지라도 한국인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DNA는 감추어지질 않는다. 한 때 팝송의 우상이었던 마이클 잭슨이 표피수술을 하고 표백제를 발라도 흑인임을 면치 못했듯이, 지금 뉴욕에서 미국시민으로 살고 있는 나의 어린 손자 정윤재가 한족(韓族)임을 면할 순 없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중국인은 자기네 전통과 언어, 문화 풍속을 고이 간직하려는 노력이 대단하다. 그 저력이 오늘날 이스라엘을 세계적 강소국으로 만들었으며, 중국은 13세기 한 때 몽골의 영웅 징기스칸의 말굽에 영토가 짓밟혔으면서도 결국 그들을 흡수하여 복속시키기에 이르지 않았던가.
뉴욕에서 느껴지는 유대인의 영향력은 각별하다. 어느 지역에서는 유대인의 축제일이 되면 학교가 아예 휴교를 할 정도이니 말이다. 이즈음 중국은 세계의 ‘블랙홀’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 어느 곳에 가 봐도 ‘메이드인 차이나’ 아닌 것이 없느니.


우리는 한 때 한국인임을 밝히기를 꺼려한 적이 있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로 연명하고, 국민소득 60달러 수준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궁핍했던 시절,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만큼이나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던 후진국. 그 때는 정말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웠고, 밖에 나가서 국가적 자부심이나 민족적 긍지같은 건 가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숱한 고난과 역경을 넘어 이제 이만큼 살만하게 됐다. 세계 10위권에 드는 나라가 되었으니, 세계 역사상 이런 나라가 없다. 이젠 우리 것을 다시 살려내고 우리 것을 자랑하며 우리다운 모습을 재창출해야 할 때이다. 그렇게 될 때 미국에서는 한국인 2세를 더욱 알아줄 것이고 세계는 한국을 더욱 값비싸게 쳐줄 것이다.

글로벌리제이션은 자기 고유의 것을 내동댕이치고 외래의 것이나 현지의 것에 적응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 지구화에는 지방적 차이와 다양성을 촉진하고 장려하는 원심력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장 토착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그 대표적 표현이다.
로버트슨의 ‘전 지구 지방화’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맥도날드가 아무리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도 김치같은 전통음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전체적인 것과 국부적인 것은 서로 긴밀한 연계성을 가지고 상호 보완적 작용을 함으로써 세계는 평화 공존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근래에 와서 해외 한인 2세들이 연수차 모국을 방문하는 기회가 잦아졌다. 작년에 뉴욕에 사는 조카 엘리사가 연세대학교에서 한 달 동안 연수과정을 다녀왔다. 좋은 학교에서 장학생으로 공부를 잘하는 엘리사는 장차 미국사회의 주류 그룹에 편입될 것이다. 그때 자기가 몸담고 있는 미국의 시민으로서 충실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울러 한국인임도 잊지 않기를 당부하고 싶다. 나의 장손 윤재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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