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장승업

2009-05-0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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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오 백년에 그림으로 빛을 내고 이름을 남긴 세 화가는 단원(檀園) 김홍도와 혜원(惠園) 신윤복, 그리고 오원(吾園) 장승업이었다. 단원 김홍도는 정조시대에, 혜원 신윤복은 영조시대에, 그리고 오원 장승업은 이조 말기 고종시대를 살았으니 이 세 사람이 이씨조선 후기의 화가들이다.
이들 중에서 장승업이란 사람은 조실부모하여 저자거리를 거지행색으로 다니며 구걸걸식과 술로 살았다. 집안 환경이 그러하니 서당 근처에는 가보지를 못하여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글은 몰라도 그림만은 천부적 소질로 잘 알고 있었다. 천한 신분으로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다리 밑에서 술에 취하여 잠이 들기도 했고, 양반 집 대문 앞에다 대고 오줌을 갈기기도 하였다.

열강들의 간섭정치에 내정은 부패하고 어지럽고 살림살이는 궁한 세상에서 장승업은 취기를 동원하지 않으면 세상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단원 김홍도를 빗대며 “너만 원이냐, 나도 원이다”하면서 자기의 아호를 “오원(나도 원)”이라 지은 장승업. 조선후기 삼대화가의 아호에는 끝 자가 모두 “원”(園}이 되었다. 장승업은 나에게 문학정신을 혹독하게 가르쳐준 김관식 선생이나 김말봉 여사의 서자인 이현우 선생이 사회를 바라보던 울음 섞인 눈동자와 같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미학이란 절대적 진리이고 절대적 사상인데 “그림은 그림일 뿐, 애써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부끄럽다” 하던 장승업의 예술론이나 “문학은 문학일 뿐, 그 위에다 애써 의미나 철학 따위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한심스럽고 그와 같은 행위가 오히려 문학을 망친다” 하던 김관식 선생이나 이현우 선생은 장승업과 술도 닮았고 취기도 닮았고 행실도 닮았다. 천재들의 소행일까? 자유분방한 삶은? 나는 여기에서 분방이란 말은 빼려고 한다. 이분들은 자유를 갈구하고 또 자유스럽지 못한 현실에서 자유스러운 척 하면서 살기는 했으나 분방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군사혁명이 성공하고 군 정권이 들어서자 문화공화국을 세워야 한다면서 광화문 네거리 근처 월계수란 다방에다 문인들을 불러놓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고는 각부 장관이랍시고 일일이 장관을 임명하고 또 술집으로 사라진 김관식 선생. 전생의 악연이라면서 생면부지의 민주당 거물 장면씨를 괴롭히며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집마저 홀랑 날린 후, 오히려 장면 씨의 후원으로 얻은 무상의 땅에다가 술에 절어 지어놓은 홍은동 산마루 동산 집에서 간 경화로 굳어진 가슴을 스스로 때리며 38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김관식 선생이나, 살아있으면서도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끌고 다니다가 행방을 감춘 이현우 선생의 생애와 다를 바 없다. 천재들이란 오기와 방황과 용광로처럼 끓는 열정을 술에다 풀어 녹이는 사람들일까?

고종은 그림을 잘 그리는 장승업을 궁궐로 불러 초상화를 그리게 했으나, 자유스럽지 못한 궁궐은 견딜 수가 없다하며 술 한 동이 퍼마시고 야밤에 도주하여 다시 저자거리로 나왔다. 이현우 선생도 술에 취해 살던 장승업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문학과 예술은 요구에 의해서 창작된다. 요구가 없는 현대인의 외면 앞에서 문학과 예술은 힘을 잃고 스러져간다. 문학과 예술의 창작과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요구의 갈망을 찾지 못
하는 예술가들은 정신적 자유를 대신하며 취기에 젖어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이 세상천지에 자유가 어디에 있는가? 삶이 구속이고 경제가 구속이고 인간관계가 모두다 구속이라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나 예술가들은 이승살이 걷어치우고 하루라도 빨리 멀리 사라지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
김윤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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