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의미있는 삶

2009-04-30 (목)
크게 작게
윤석빈(교도소 심리학자 )

절망은 삶을 특징지우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삶은 과연 좋은 삶이며 의미가 있는 삶인가. 그것을 정하는 데는 자고로 두 가지 측면의 방법이 있어온 것 같다. 그 하나는 인생에는 고락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그 인생에 괴로움이 더 많았
나 혹은 즐거움이 더 많았나를 관측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고통보다 쾌락을, 그리고 가치없는 것보다는 가치있는 것을 선택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중히 여기는 소위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이라고 불리는 경제이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좋고 의미있는 삶은 괴로움은 최소이고 즐거움은 최다인 삶을 지적하는 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좋은 삶과 의미있는 삶의 척도를 도덕적인 측면에 두자는 방법이 있다. 그 삶은 올바른 삶인가, 본받을 만한 삶인가, 존경할 만한 삶인가 하는 고려가 여기에 들어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힐난이나 정죄를 받기보다는 칭찬받고 좋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기본 태도가 있음을 말한다.


한동안 인간복제(cloning)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복제하고 싶은 인간으론 김구선생과 테레사 수녀와 박정희 대통령을 든다고 했다. 군사독재 타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 아직 있을 듯하다. 존경받아야 할 공인들이 타락상을 보이고도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갖지 않는 인상
이 있다. 도덕적인 관측으로 말하자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리는 분별력이 그 사람에게 있어야 하고, 자기에게 손해가 있어도 분별력의 판단대로 행동하는 용기가 또한 있어야 함을 지적한다.

좋고 의미있는 삶을 사는 희망이 없다든지 그러한 삶을 살 가능성이 없다는 입장, 그것은 절망의 입장이 아닐 수 없다. 삶속에는 적막한 입장이 참으로 많이 있다. 기아와 빈곤, 전쟁, 불치의 병, 가족의 죽음. 이혼, 실직, 사업실패... 그밖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고 큰 불상사들이 사람
을 절망의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개인을 우리는 절망 속에서 허덕인다고 표현한다.

돌이켜보면 모든 인류의 종교와 지식체계는 이러한 인간의 절망상태를 강조하면서 그러한 상태를 극복하거나 거기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도다’. 인생은 ‘괴로운 바다’라고 했으며, 원죄 때문에 인생의 종결은 죄악과 사망 뿐이라고 했다. 인생은
살 가치가 없으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염세주의 사상도 있다. 절망에 처해있는 사람을 심리학에서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중심에는 절망이라는 것이 들어 있다.

우울증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무력하다. 세상은 불공평하며 불의하다. 여기서 헤어날 길이 없다.” 즉 자신과 세계와 장래에 대하여 암담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은 그의 생각에서 오는 것이며 그의 굳은 결론은 그의 인식체계에 등록되어 있으니 이것은 그의 태도와 행동을 뒷받침하는 신념이요, 믿음이다. 요즘 우울증의 원인은 뇌물질의 화학작용에서 온다고 하여 약물치료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울증은 절망과 연관되어 있고, 절망은 삶의 부정과 연관되어 있고, 또 이러한 부정은 그의 인식체계와 연관돼 있는 점을 상고해야 한다.

우울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몹시 괴로운 사람이다. 그는 자신 뿐 아니라 주위사람도 괴롭게 만든다. 글의 하는 모든 일은 능률이 없으며 자신과 주위에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 옛 부터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학자라고 하였다. 지혜는 인간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빛을 던져준다. 인간이 가지고 있고 지혜의 총체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인간에게는 좋은 삶, 의미있는 삶을 살 자격과 소질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은 가능하다고...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