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흙을 생각한다

2009-04-17 (금)
크게 작게
김윤태(시인)

이광수씨의 ‘흙’이나 박경리 여사의 대작 ‘토지’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 않은 줄거리를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이 뉴욕에는 많다. 소설이 따로 없다. 이민이란 짐 속에 이미 이별과 슬픔과 절망의 이야기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웃음 뒤에 서려있는 그늘, 성공 속에 가리어져 있는 상처들,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 뒤에 따라 다니는 아쉬운 옛 이별들, 뭐라고 말을 해야 명확한 답이 튀어나올지 안개 속에 보이는 이정표 없는 길 위의 얼굴들이다.

흙이 아니라 아스팔트길을 밟고 살아온 문명시대의 사람들에 섞여서 살아온 우리들, 혜택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많다.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유독 흙의 색깔과 흡사한 우리들의 얼굴들이 가끔씩은 흙을 그리워하고 흙 길을 걸으며 흙을 만지고 싶어한다. 그리워 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에 한솥밥을 먹으며 한 지붕 아래에서 자주자주 짜증을 안고 다투면서 살아도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또한 부부가 자식들을 걱정하며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흙이란 만물의 근원지요, 돌아가야 하는 본향이기 때문이다.
속옷 한 벌 걸치지 않고 겉치레 없이 누어있어도 풍족하기만 한 저 흙들! 온 세상이 한 덩어리 흙인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무거우면서도 힘들다 말하지 않고, 숱한 바람이 그 위를 지나갔어도 주름살을 만들지 않는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원의 증거요, 땅위에서 살다간 모든 것을 품고 있으면서도 어느 한 곳 부풀지 않는 것은 전부를 품에 안고 삭혀 줄줄 아는 자비이기 때문이다. 흙을 닮은 사람들은 말이 필요 없고, 흙을 닮은 사람은 장식이 필요 없다. 흙은 기다림 자체이
기 때문이다. 흙을 닮은 사람은 손익계산서가 필요 없다. 밤낮으로 누어서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지만 어느 한 순간도 하늘에서 눈을 띠지 않고 하늘의 가르침을 받는다. 하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자비다. 사시사철 피가 고여있는 동백의 그리움도 자비 앞에서는 무능하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바닷가의 바위를 후벼파는 거친 파도도 자비 앞에서는 무능하다. 신혼마차 바퀴의 구르는 흥분도 자비 앞에서는 멈추어 선다. 그만큼 흙의 본질 앞에서는 더 나가야 할 방향이 없다. 삼천포라는 사람 사는 작은 항구도시가 잘 나가다가 옆으로 빠져나가는 사람을 빗대어 쓰자
그 동네 사람들 심사가 꼬여 사천시로 바꾸어 놓았지만 그 이름이 중국의 어느 도시 이름과 같아 사천 짜장면을 떠올린다 해서 다시 웃음거리가 된 땅! 땅이면 땅이고 흙이면 흙이지 거기에 무슨 이름이 필요한가 하면서 세금을 받아내려는 행정구역을 흙이 웃는다.

색.향.미.촉.성, 오근에 의하여 일어나는 이 지상파의 모든 근원이 흙인 것을 우리는 잊고 산다.이름이 없고 소리가 없어도 위대한 저 작은 밭고랑의 흙들, 흙 등에 내려앉는 초여름 햇볕이 짊어지고 온 굵은 주름살을 죽 죽 펴면서 오이 잎새와 놀고 있다. 평화스러우니 줄거리 마디마디 오이새끼가 달린다. 하늘의 허락을 받고 내미는 열매를 흙이 키우다가 거두어 갈 시기가 오면 흙이 거두어 또 삭힐 것이다. 질서다.
질서는 철학과 개념을 세우는 근본이고, 그 울안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흙을 잊고 살고 있으니, 그걸 우리는 잊고 살고 있다. 미국의 대 부호 록펠러 회장이 bedford 한적한 동네에다 많은 돈을 들여 흙 길을 만들어 놓고 걸었던 까닭을 흙을 보고 생각하면 그 속 깊은 뜻을 알겠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