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이민자 ≠ 더부살이 인생’

2009-04-0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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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취재 1부 부장대우)

실직, 부족한 영어실력, 이혼, 그리고 여자친구와의 가슴 아픈 이별…
실패로 얼룩진 이민생활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달 3일 뉴욕주 빙햄튼에서 세상을 향해 분노의 방아쇠를 당긴 지벌리 웡.

즐거운 주말과 10여일간의 봄방학을 시작하는 한가로운 금요일 오전에 들려온 총성 세례로 13명의 무고한 목숨이 희생됐고 범인 웡도 자살한 이번 총기난사 사건은 같은 처지에 놓인 한인을 비롯한 소수계 이민자들에게는 또 다른 아픔으로 다가온다. 범인 웡처럼 미국생활 20여년이 지나도 영어 구사력은 갓 이민 왔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대다수 한인 1세 이민자들의 현실이다. 한국의 해외이주노동자들이 불과 수년 만에 완벽에 가까운 한국어 구사력을 갖추는 것과 비교하면 이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주류언론이 조명한 사건 동기 분석에서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주위의 놀림을 받은 것이 원인의 하나로 지목된 대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대다수 한인 이민자들도 잠정적인 살해범이 될 수 있다는 해석 가능하다.
때문에 주류사회에서 지나치게 이런 부분을 부각시키는 것이 자칫 미국인들로 하여금 이민자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주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한인들도 한 번쯤 되돌아봐야 할 일이 있다. 영어가 서툰 이민 1세대 한인 부모들의 상당수가 영어권 자녀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일이 허다하고 그런 부모가 경제력마저 상실하면 부모의 위치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그럼에도 한인 1세 부모들은 그저 돈 버는 데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할 뿐 심지어는 자녀가 다니는 학교 이름이나 학년, 어떤 특별활동을 하는지도 모르는 부모가 의외로 많다. 자녀와 언어장벽으로 대화 단절 상황이면서도 한국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자랑스러운 듯이 떠벌리는 부모들의 속은 때론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남의 이목이나 체면 때문에 이민생활 20년이 지나서 새삼 영어를 배우러 다니기 쑥스러운 한인들의 정서와 달리 웡은 그래도 불과 얼마 전까지도 영어교실에 등록해 나름 애쓰고 노력했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가 물론 용서 받지 못할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한편으론 그간 심적 고통이 어떠했을지 같은 이민자 입장에서 안쓰러움도 느껴진다.

이민자들은 더부살이 인생이 아니다. 미국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의무를 다하고 있다. 다만 그만한 권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최대한 당당하되 부족한 부분은 채우려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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