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4월은 잔인한 달

2009-04-0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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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겨울은 농부도, 자연도 모두 휴식의 계절이다. 그러나 4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봄이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느라 분주한 계절이다. 겨우내 얼어있던 땅을 제치고 새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마치 고통을 통한 부활의 역사를 잉태하듯 봄은 새로운 삶의 태동, 알에서 깨어나는 새 생명의 역사를 일깨운다. 4월은 이렇게 긴 잠, 긴 고통에서 벗어나 부지런히 살아 움직여야 하는 달로 장식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20세기의 대표시인 T.S. 엘리옷은 수많은 시인들이 잠자는 생명을 깨우고 그 생명을 자라게 하는 봄의 출발을 예찬한 것과 달리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표현했다. 이것은 1,2차 세계대전 당시 절망으로 암울했던 상황 때문이었을 것으로 사람들은 보고 있다. 희망의 시작이 아니라 황폐해져가는 잿빛도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아무 것도 없이 무의미한 시간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잔인한 달 4월의 의미를 나쁘게 보고 싶지 않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자면 어느 정도 좋은 의미의 지독함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더욱이 모든 것이 다른 남의 나라에 와서 이민생활을 하는데 강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 것인가. 잔인성이라 함은 아주 나쁜 의미로 통용되는 게 일반적이다. 잔인성은 보통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짓밟는 아주 사악하고 혐오스럽고 비열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잔인성은 국가
와 시대를 초월, 지금도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인간의 잔인성은 시대마저도 초월한다. 숱한 고문이나 테러리스트들의 잔혹함, 무차별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총격사건 및 살해사건 등. 이는 모두 무한한 적개심이나 복수심에서 빚어지는 잔혹함이다.


이 잔인성이란 단어를 엘리엇이 봄의 새로운 세상을 어둡게 보았듯 부정적으로 보다 이왕이면 긍정적인 쪽으로 해석해 보면 어떨까. 잔인함의 단어 속에는 내면에 엄청나게 강한 힘이 들어있다. 이 힘을 잘만 활용한다면 아주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가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쓰게 되면 엄청난 해악을 동반. 범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잔인성이란 어떻게 쓰여지는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이 단어를 생활에 잘 적용하는 지혜와 혜안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요즘 한국이나 미국사회를 보면 잔인하다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한국은 툭하면 부정부패, 일종의 범죄가 지도층인 청와대에서부터 공무원,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만연돼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잔인성에 숨겨진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범죄이다. 최근 신문을 도배하다시피 하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불법 정치자금 제공이나 탈렌트 장자연을 죽음으로 몰고 간 기획사 및 PD 등의 고질적인 만행 등도 말 그대로 개념이 실종된 잔인성의 결과다.

세계경제를 파탄시킨 월가의 부자들이나 정부의 구제금융 기금까지 보너스로 빼먹은 파렴치한들의 케이스도 마찬가지다. 그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빈곤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한인사회에는 그래도 범죄에 이르는 잔인성을 가진 한인들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하지만 이따금 발생하는 이민사기, 계사기, 매춘 등은 건전하게 살아가는 이민사회를 헤치는 독버섯으로 떠올라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 때도 있긴 하다. 이는 사회의 구성원이 잔인함의 참 의미와 수위를 조절 못해 야기되는 범죄이다. 잔인함의 실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확실한 결과를 얻어낼 수가 있다. 폭발적인 열정과 인내, 투지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잔인함에 들어있는 긍정적인 상징성과 개념을 바르게 아는 생각의 기본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민의 삶을 짧은 역사 속에 성공시킨 것도 잔인할 정도로 우리가 죽어라 일하고 장사하고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덮어놓고 4월을 잔인하다 하기보다 4월에 숨은 교훈이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하며 지냈으면 한다. 4월은 참 희망을 가지고 새로이 시작되는 달이다. 밟아도 밟아도 쓰러지거나 넘어지지 않는 잡초처럼 강건하게 살되, 열정으로 남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으로는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왕 살 바엔 공포의 잔인함보다도 투지의 잔인함을 갖고 사는 것이 훨씬 더 멋지지 않는가. 죽음과 부활이 공존하는 4월이면 유독 마음이 설레는 건 나뿐일까.juyo 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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