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독립신문과 선구자 서재필

2009-04-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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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영 (전 언론인)


‘7일은 신문의 날’ 지금부터 113년전인 1896년 바로 이날 선각자 서재필 선생이 서울에서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한국에서는 이날을 신문의 날로 정하고 기념하고 있다. 독립신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서재필은 누구인가?

조선조 말기, 한반도는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을 위한 각축장으로 되어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이런 때 오랜 미국망명에서 귀국한 서재필은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근대화. 부국강병을 이뤄야하며 이보다 앞서 미개한 봉건 암흑에서 백성을 깨우쳐야한다는 평소의 신념아래 대중 홍보수단으로 독립 신문을 발간했다. 한글전용으로 온 백성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펴낸 신문은 나라의 자주권과 독립수호를 위해 외세의존과 망국적 사대주의 사상의 독소를 뽑아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신문은 사대적 수구세력의 미움과 질시를 받으면서도 민중교화에 선도적 역할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수구세력의 온갖 방해와 역경 속에 허덕이던 신문은 1899년 12월 3년8개월만에 결국 폐간되고 서재필은 다시 조국 땅에서 눈물을 머금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전남보성 태생인 그는 남달리 총명하여 18세에 과거시험을 보아 최연소 장원급제한 수재였다. 가정배경으로 보아 마음먹기에 따라 출세와 안일한 한 생이 보장된 행운아였으나 김옥균 등과 어울리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일신의 영화보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대의를 따르는 험한 길을 택한 것이다.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 진보적 청년 애국세력은 일본을 모델로 하여 나라의 근대화를 꾀하여 유혈적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일본의 배신과 청국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만다. 주모자들은 일본으로 피신하였으나 서재필의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아무리 명분
이 훌륭해도 대중이 따르지 않는 엘리트 몇 사람으로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는 귀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가슴 저리는 슬픔과 참담한 실패의 쓰라림을 안은 채 그는 1885년 미국땅 샌프란시스코에 내렸다.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이 한 명도 없는 낯선 땅, 인종차별까지 격심하였다. 함께 온 서광범, 박영효는 한 달을 못 견디고 돌아갔다. 서재필은 낮에는 광고지를 돌리며 하루 10마일 이상을 뛰었고 밤에는 교회나 YMCA를 다니며 영어를 익혔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동양
청년을 눈여겨본 한 독지가의 주선으로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할 때까지 숙식을 해결하는 도움을 받았다. 서재필은 워싱턴DC로 옮겨 생활의 안정을 얻은 후 야간의과대학에 입학, 각고의 노력 끝에 졸업하고 의학사가 된후 인턴과정을 마친 다음 개업의가 되었다.

미국 철도우체국장의 딸과 결혼도 하였고 인쇄업까지 겸해 돈도 벌었다. 미국 정부는 동양인에게 좀처럼 주지 않는다는 시민권을 수여, 그는 제 1호 미국국적자가 되었다. 그는 총리대신이 된 박영효의 간청대로 전 재산을 팔고 부인까지 데리고 조국으로 돌아와 독립신문을 펴냈고 수구파의 방해로 3년여만에 문을 닫고 쫓겨났으나 독자들에게 독립자주정신과 선진사상을 심어 놓았다. 그는 광복된 조국이 둘로 갈라져 6.25동족상잔이 일어났다는 비통한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이듬해 1월 87세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진보적 사회운동가로 독립을 위해 투쟁한 불굴의 애국자였으며 역경을 이겨낸 의지의 이민개척자였다. 서재필은 우리 재미 한인들의 선구자이며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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