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선거문화, 이래도 되는가

2009-04-0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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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20년 전 노인회를 상대로 취재를 할 때였다. 노인들을 위한 무슨 잔치나 행사 때 가보면 노인들이 하는 모습에 그만 아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적이 많다.

부페식으로 하면 노인들이 아예 집에서부터 가져온 크고 작은 지퍼 백에 음식을 담느라 모두 정신이 없어 보였다. 미처 백을 준비해오지 못한 노인은 커다란 샤핑 백 하나 구해 김치고 뭐고 한곳에 다 섞어 넣어 비빔이 된 반찬을 집에 가져간다. 문제는 이 음식을 집에 가서 냉장고에 넣어두지만 집에 한 두 명이 살다 보니 채 먹지도 못하고 그냥 다 버린다는 것이다. 또 떡이나 음식을 1인용 컨테이너에 담아 제공할 때는 앞줄에 줄 선 사람이 자기 몫을 타가지고 나와 다시 치마폭이나 호주머니에 넣고 뒷줄에 다시 서 또 타다 보니 나중에 온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 주최 측이 음식이 없어 난리굿을 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곤 하였다. 다는 아니지만 이것이 한국에서 배고픈 시절을 거친 한인노인 대부분의 의식수준으로 본다면 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선거에 임하는 의식수준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미국에 와 살고 있는 한인 노인들은 모든 것이 풍부하고 문화수준이 높은 미국에 와 살아도 거의 모두 가난하던 때의 생활방식을 못 벗어난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게 맞는 답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누구의 원인이든 현수막이고 포스터고 엄청나게 길에 걸려 미국인들조차 의아하게 여겨 뉴욕 타임즈에 까지 날 정도로 전례없이 과열됐던 선거임엔 틀림없다. 봉사직을 뽑
는 선거에 그렇게 까지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게 이번 선거를 보는 많은 한인들의 지적이었다. 앞으로는 각 선관위에서 기탁된 공탁금으로 벽보 붙이고 공고하고 토론회를 하는 것으로 끝내고 후보들의 일체 개인적인 홍보는 없애 깨끗한 선거로 과열선거를 막아야 한다는 것.

미국인들은 후보를 알리기 위해 가정방문해서 값 안 나가는 볼펜, 혹은 잔디밭이나 집 안 팍에 꽂을 수 있는 팻말을 만들어 제공하여 돈 안드는 방법으로 선거한다. 우리는 이런 민주적인 방식을 배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수준높은 미국에 와 살면서 어처구니없게도 60년대 한국에서 하던 수준의 선거를 한다는 건 좀 창피한 일이 아닌가. 60년대 한국에서는 정당들이 농촌지역 같은 곳의 표심을 확보하기 위해 돈을 풀어 타락선거를 거의 대놓고 하다시피 했다. 당시에는 농촌에 신발이 귀해 이들에게 고무신을 배급하고 또 농부들이 좋아하는 막걸리를 몇 말 씩 풀어놓고 마시게 해 먹고 마신 사람들이 표를 찍어주는 것이 당연시 됐었다.

이런 선거문화가 몸에 젖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난으로 인해 몸에 밴 거지근성이 미국까지 와서도 남아있기 때문일까? 이번 뉴욕한인회장 선거를 앞두고 한인들이 보여준 지저분한 행태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는 게 선관위원회와 출마했던 세 후보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선관위에 의하면 이번 선거에 임했던 세 후보 모두 처음에는 향응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선거는 하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다는데 그 약조를 지킨다는 것은 차라리 선거를 안 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여서 그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예를 들어 5,6명이나 10여명의 한인들이 식당에 모여 그중 한 명이 후보에 직접, 혹은 선대위나 후보와의 조그마한 인연을 핑계로 어느 누굴 통해 간접으로 알려 “우리가 여기 모 식당에 있으니 후보가 와서 인사를 하고 가라”면서 대접해주기를 요구해오는 일은 아주 당연지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약한 후보가 와서 꾸뻑 인사하고는 바쁘니까 나가려고 하면 농담 반, 진담 반 조로 “왜 왔다 가는 거야? 나가면서 계산을 해주든지...” 라고 빈정거려 계산을 하지 않고는 그냥 나올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후보자 자신을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 더욱 웃기는 것은 이 사람이 또 다른 두 후보에게도 전화해 후보들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도 없는 게 사실이었다고 한다. 동문회다, 향우회다, 친목계다 하는 모임도 은근히 그와 유사하게 나와 때에 따라서는 모임의 식사 값을 지불하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는 소리도 뒤따랐다. 그러다 보니 결국 세 후보 모두를 놓고 볼 때 이번 선거에서 소신을 지킨(?) 후보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정답이라는 소리다. 결론적으로 이번 한인회장 선거의 타락성은 표를 찍는 한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따른다.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의 문화를 여기까지 와서 이어간다는 건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후보의 태도를 지적하기에 앞서 고리타분한 문화에서 탈피 못하는 우리들의 탓임을 우리는 이제 좀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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