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살방지 안전망 절실하다

2009-03-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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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웅 (공학박사)

만리 타향에서 비극적인 방법으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온 삶을 마감해야 하는 한인을 볼 때마다 괴롭기 짝이 없다. 살아가면서 누군들 골백번쯤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누구는 자살해서는 안 되는 백 가지
의 이유를 대기도 하고 또 죽을 용기가 있으면 살지 왜 죽느냐고 한다.
그렇다고 살아있는 우리가 더 잘났을까. 어쩌면 그 반대일런 지도 모른다. 다만 너무나 안타까운 일은 “좀더 달리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하는 것이다. 이런 말조차 부질없는 지도 모른다. 달리 생각하고 싶어도 어디 그럴만한 데가 없었을 것인지도. 우리의 생명보다 더 귀한 자식을 두고 떠나신 그 마음의 끝을 어찌 우리가 알겠는가. 이곳에만 약 50만의 동포가 산다는데 아직도 조직적인 마지막 안전망이 없는 듯하여 안타깝다.

이번에 홀로 남겨진 고인의 영애에게 보여준 한인들의 뜨거운, 당신들이 보여준 사랑은 지은양의 가슴에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사람은 돈이 없어지면 생각의 범위가 좁아진다.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1971년 여름 나는 동부의 한 대학원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영어는 굿모
닝, 땡큐 정도밖에 몰랐다. ‘유아 웰컴’은 그저 상대가 날 환영한다, 좋아한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캐시어 여자에게 땡큐하면 돌아오는 말 ‘유아 웰컴’-나는 혹시 날 좋아한다는 소린줄 알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유 투마로’하면 내일 만나자는 뜻으로 알았으니 다행히 전공이 공학
이라 영어를 못해도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강의실이 바뀐다는 소린 못 알아듣고 옛 강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영어는 어렵고 장학금은 언제 나올지 모르고, 가족은 보고싶고, 생활비랄 것도 없지만 줄이고 줄여도 돈은 없어지고...그러다가 딱 1달러가 남았는데 어디 기댈 데라곤 없었으니 그 때의 그 어두움이란 이루 말로 할수 없었다.


돈이 없어서 며칠을 굶었을 것이다. 배가 고프면 먹고싶은 것이 왜 그리도 많은지.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얻은 일이 청소부였다. 그때 최저 임금이 1달러 60센트였다. 그것도 얼마나 감지덕지 하던지. 청소부 일은 고되었다. 나는 걸레질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이후 아내에겐 절대 걸레질을 시키지 않았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주말에는 하역작업을 했는데 100파운드 짜리 밀가루 포대가 그리 무거운 줄 처음 또 알았다. 한번은 트럭 기사가 내게 2달러 수고비를 준 적이 있었는데 그냥 덥석 받았다. 돈이 없으면 염치도 없어지는 줄도 그때 알았다. 그 이후 나는 식당엘 가도 팁만은 후하게 놓는다. 그때 내게 가장 괴로웠던 일은 3살 먹은 딸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저년 때면 “아빠 올 시간이라고 엄마에게 마중 나가자고” 조르던 아이였는데. 또 어떤 때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 아빠처럼 꼭 안아달라”고 하였다는 소릴 아
내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을 때...

나와 똑 같은 마음을 가졌을 딸자식을 두고 떠나신 두분, 부디 영면하소서. 지금 뉴욕한인회장 선거가 한창이다. 무엇을 하겠다느니 하는 말을 많이 한다. 내겐 그런 것들이 다 공허하게 들린다. 한인이 절망에 빠져 죽어나가는데 그런 분들을 죽지 않게 하는 안전망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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