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이민사회의 효(孝)사상

2009-03-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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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희(취재 1부 기자)

“부모는 어린 자녀를 돌보고 나이든 부모는 성년이 된 자녀가 돌보는 것이 바로 자연스런 삶이죠.” 1999년 휴 잭슨 감독의 ‘블래스트’라는 영화에서 남자주인공 아담역의 브랜든 프레이셔가 자신의 아버지를 보며 여자 주인공 이브역의 알리샤 실버스톤에게 건 내는 말이다. 예전에 이 장면을 보면서 ‘미국에서 만들었지만 참 한국정서에 잘 맞는 말이다’라고 생각한 기억이 난다. 아마도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던 한국의 전통적 풍습에 대해 아는 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시대가 현대화 되면서 한국사회 내에서도 각종 양로 의탁시설을 이용하는 등 부모를 봉양하는 방법이 옛날보다 다소 변화되긴 했지만 아직도 ‘부모를 모신다’는 근본적인 사상은 계승되고 있다.

지난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오던 날 행사를 연다는 플러싱의 한 양로원에 취재 갔었다. 폭설주의보까지 내린 이날 이 양로원의 한 한인 간호사가 어느 한인 노인에게 “눈이 많이 와도 이따가 아드님이 오신다고 했으니 걱정마세요”라고 하던 말이 기억난다. 또 행사장에선 한 노인이 눈길을 헤치고 온 딸과 함께 행사를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설의 관계자는 “하루를 멀다하고 찾아오는 자녀분들이 대부분”이라며 “올 때마다 부모님의 평소 좋아하시는 간식거리를 꼭 챙겨 오는 분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나이든 부모를 모시는 일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 효 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이민 1세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말만 들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가장 최근에 들은 얘기는 친 어머니를 식모로 10년 이상 부리다 얼마 전 노환으로 치매증상을 보이자 다른 형제 집에 모셔다 두고 연락을 두절했다는 한 40대 한인 여성의 얘기다. 제보였는데 전화한 사람은 바로 이 여성의 오빠라는 사람이었다.

금전적 사정이 안 좋아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여동생 네가 미국에 오래전에 정착, 살만한 형편이라 어머니를 그 집에 모셔뒀던 것이 화근이었다며 괴로워했다. 여동생에게 전화해 따지고 싶었지만 미국 시스템을 잘 아는 여동생이 ‘경찰을 부르겠다’고 협박하는 통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도 ‘효 사상’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아마도 어떤 말 못할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더 더욱 자식들 걱정에 등이 굽은 부모님들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바쁘고 힘든 이민 생활에 치여 어쩌면 잊었을 지도 모르는 부모님의 내리 사랑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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