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 개혁

2009-03-21 (토)
크게 작게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이는 아주 무식하기 짝이 없다는 우리말 속담이다, 그림쟁이인 내가 바로 그 꼴이 아닌 가 싶다. 단골손님이 액자 주문한 종이 한 장을 앞에 놓고 종이에 인쇄된 글을 잘 읽을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종이는 만질 수 없을 만큼 부식되었지만 인쇄된 글은 선명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종이는 글씨체가 인쇄체인데 윗부분에 조그마한 그림까지 그려진 470년 된 성경이다.

아랫부분에는 영어로(zurich bible) 1540년에 인쇄한 성경이라고 별도 꼬리표가 붙어 있다. 그는 왜 종이 한 장을 이렇게 가보처럼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아마 소설 같은 수수께끼가 이 종이 속에 있을 것 같다. 시대적 배경으로 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마틴 루터(Martin Luter 1483-1546)이다. 그는 신학박사이면서 비덴베르크 대학의 성서 연구교수였다. 교황청 죄를 면해주는 면죄부를 공공연하게 돈을 받고 팔고 있는 것에 분노하여 비덴베르크 성각 교회 문에 95개 항목으로 된 면죄부에 대한 반론을 적어 붙였다.

로마교회는 루터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에게 강한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교황은 1520년에 대 직서를 발표하고 루터의 설교를 금지시키고 그의 책들은 모두 불 태우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교황의 직서를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불 태워 버렸다. 결국 그는 로마교황 앞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황제는 루터에게 법적권리를 박탈했다, 당시 독일연방국가 통치자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은신 생활을 하면서 회랍어 본문을 근거로 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히브리어 성경도 번역하였다.


만약 당시의 문명에서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다면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때 맞춰 독일에서 발명된 인쇄술은 루터의 사상이 인쇄물로 인쇄되어 타 지역으로 폭발적인 인기 속에 전파되었으며 역으로 로마까지 전파되어 면죄부에 대한 학술토론 대회까지 로마에서 하게 되었다. 그의 행적은 로마교회에 대한 고정관습을 뿌리 채 흔들어 놓았으며 이듬해 로마황제는 독일 연방국가에 카톨릭교든, 루터교든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게 되었다.물론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성서를 영어로 번역한 존 위클리프(1330-1384, 완역판은 1535년에 신약성서로 나오게 됨), 그의 성서문을 전파한 죄로 기둥에 매달려 화형을 당했던 요하네스 후스(1369-1415)는 프리하 대학교 총장이었다. 이탈리아 지를라모 사브라홀라(1452-1498)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신에 감화하였다는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어디 이들 뿐인가? 프랑스의 장 칼뱅(1509-1564)은 종교박해 때문에 파리에서 떠나 스위스와 많은 나라에서 박해를 피해 도피한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가들을 모아 칼뱅주의 노선을 수립하였다, 칼뱅주의는 영국의 청교도와 더불어 북아메리카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미국역사다, 만약 그들 개척정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미국 또한 번영을 가져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 종이속의 500년 수수께끼는 하느님만이 알 것이다.

김철우 홈아트 갤러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