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예루살렘을 가다

2009-03-1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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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커네티컷 주립대 명예교수·정치학박사)

필자는 최근 예루살렘(Jerusalem) 성지순례를 할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첨예한 갈등을 다기한번 엿볼수 있는 뜻깊은 기회였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동아시아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러시아, 중국, 그리고 남쪽에는 일본과 미국 등 4강이 서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중동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이집트, 사우디 아라비아, 그리고 요르단이 둘러 싸 있고 북녘에는 레바논과 시리아와 같은 아랍국가들이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조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 식민지시대 말기인 1945년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
해방이 되고 한국역사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역사의 운명과 이스라엘 역사의 운명을 비교한 책 중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함석헌 저)’는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동시에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공존하며 서로 경쟁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교의 창시자인 모세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 그리고 기독교의 예수는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종족은 기원전 8000년경에 현 이스라엘 땅에 정착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대 종족은 기원전 1500년-1800년경에 이스라엘 땅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도 비슷한 연도를 인용했다. 팔레스타인 종족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번창하기 시작하고 유대민족은 6천년 후에 이스라엘에 정착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원조는 팔렌스타인이라고 보는 학자가 다수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동의 정치현상은 주객이 전도되어 유대민족은 영미제국의 후원으로 이스라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단군 조선으로부터 5천년의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만년 이상의 찬란한 역사가 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매우 인상 깊게 느낀 것은 이스라엘은 만 년의 역사적 유적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서울 인구의 반도 안 되는 5백 2천 15만 여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울 보다 관광객이 더 많이 찾아오는 것은 역사적 유적지가 더 많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한 현상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으로 유대민족을 위한 국가의 성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영국이
주장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정권의 학대를 받은 유대민족은 팔레스타인 영토인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양분하여 유대민족을 위한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한 것은 1948년이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개의 민족 국가로 분단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으며 1967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선제공격하여 ‘6일간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스라엘군은 6일간에 시네(Sinai), 고란 하이트, 가자 스트립, 서부 뱅크, 그리고 동부 예루살렘 등의 영토를 점령했다. 따라서 60만 여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피난민 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가 분단된 후 6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팔레스타인이 유대교와 이슬람교 분쟁으로 분단된 지도 반세기가 넘었다. 분단의 쓰라림을 안고 이스라엘 민족은 한민족과 똑 같이 전쟁보다 평화를 추구한다. 우리를 안내한 사람은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하고 오하이오 주립 대학을 졸업한 지성인이다.

그러나 자기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으로 귀화하고 유창한 영어와 해박한 역사지식으로 베들레햄부터 시온산, 다윗 왕의 묘, 오리브 산, 겟세마네 동산, 그리고 갈릴리 바다, 예수의 기적 오빙 이어의 기적을 보인 캐이퍼마운 등의 유적지를 안내했다. 요르단 강에서 다시 세례를 받은 경험은 우리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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