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예문화

2009-03-0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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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춘기 (골동품 복원가)

고대 청동기 예술은 단연 중국 은시대(BC 1100)의 ‘청동도철’이 으뜸이다. 무섭다기 보다는 징그럽고 비상식 이전의 초 상식적이고, 신비하다 못해 위협적인 원시 본능적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바로 불가사의한 청동도철의 예술성이다. 이런 예술성은 생각하고 구상 따위로 ‘미’를 도출시키고저 하는 의지에서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옥과 같이 무시무시한 지하공방! 이글거리는 수천도의 불 앞에서 발족쇠 때문에 불구덩에 뛰어 들 수도 없고 망치로 박살내고 싶은 벼락같은 충동을 참고 달래면서 공포와 전율, 증오와 슬픔이 미세한 공구 끝을 통해 청동에 투사되어 이룩되는 작품이 ‘청동도철’이다.

바늘구멍 같은 내일의 희망을 가공하면서 참고 참고 또 참아가면서 나도 모르는 가운데 지옥과 천당을 한조각 청동에 연출시킨 노예예술이다. 일명 골동(고미술)예술의 극치라고도 한다. 중국왕조시대 궁내에 기거하는 궁녀는 천명을 웃돌았다 한다. 십대에 뽑혀서 아니면 돈에 팔려 궁에 들어와 이 가운데 몇 사람만이 황제의 품에 안기고 나머지 대다수는 삼십대에 궁녀신분에서 퇴출된다. 죽어서 시신으로 궁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돈에 밝은 궁 내시들은 퇴출궁녀를 외딴 별궁에 집단으로 수용시켜 집중적으로 공예품 제작에 투입시켰다. 황제를 비롯한 귀족, 장안의 갑부를 대상으로 하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희귀품을 비롯한 최상급의 공예
품을 만들어 냈다.


독수공방 삼 사십 대 부녀자의 불덩어리 같은 마음을 은장도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달래게 하지 않고 상아나 옥돌에 바늘구명을 포도넝쿨 모양 뚫어가는데 집중시켰고, 박달나무에 살아 승천하는 이무기를 조각하라고 하였다.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다. 1센티미터 깊이의 옥돌바늘구멍을 뚫는데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일 년도 좋았다. 못하면 다음 궁녀가 이어갔다. 숙련공이 되기까지 3년이 고비다. 하루에도 서 너 명의 궁녀가 예리한 공구로 허벅지를 비롯하여 가슴을 난자하며 죽어갔다. 훈련 숙달이란 무서운 결과를 창출해 낸다. 고비를 넘긴 궁녀의 눈에 바늘구멍이 황소눈알 만치나 크게 보인다. 송충이가 수없는 미로를 만들면서 소나무를 갉아먹고 돌아가듯이 숙련된 궁녀의 손이 옥돌 속을 파고든다. 바로 옥돌조각의 장인이 된 것이다.

내가 경험한 걸작품 가운데 하나는 상아로 만든 문방구 필통이 있다. 상아필통의 표면은 일상거리에서 육으로 볼 때 종횡으로 질서정연하게 검은 점이 찍혀있다. 그런데 확대경을 들이대었을 때 이 흙점이 점자로 쓴 천자문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무아지경에서 머리가 숙여진다.근간에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나의 주위에도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나 절간에 가는 시간 절반만 잘라내어 박물관에 가 보라!” 고. 허기진 창자를 수도꼭지 냉수로 달래며 혼신을 투신한 예술품으로 넘쳐 흐른다. 평생에 800점의 걸작을 그리고도 인간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빚을 갚지 못하면 내 영혼을 주겠다고 절규하며 동생의
품에 안겨 죽어간 반 고흐의 작품 앞에 서보라. 거기에 길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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