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완성을 향해 가는 사람들

2009-03-0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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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아름답다고 항상 여기고 있던 것은 완성이란 개념을 정해놓고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땀을 쏟는 모습이다. 완성은 결과에서 가늠하기보다는 과정이 곧 완성의 모습이라고 나는 늘 여겨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들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은 소질이 있었어!” “그 사람은
능력이 있었어!”하면서 성공한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이나 어려운 과정 이전에다 올려놓고 우선 점수를 후하게 준 후에 다음 것을 평가기준에 올려놓는다.

사람들은 성장과정에서 선택을 성공적으로 완성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모두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노력, 나는 불가능한 완성의 결승점보다는 오히려 완성하려는 노력에다 완성이란 정의를 올려놓는다.운동에 기질이 있는 사람의 성공은 끈임없는 연습에 있고, 장사에 능력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장사의 길을 개척하는 피나는 노력이 있다. 또한 문학이나 예술에 소질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려는 욕망과 부단한 명상에 심신을 바치고, 명상에서 얻은 결과를 전달하기 위해서 해석과 표현의 방법을 극대화하려고 몸부림을 친다. 진정한 완성의 모습을 나는 여기에서 본다.


결과를 놓고 가늠하는 잔인한 완성의 개념보다 과정의 노력이 어찌 더 아름답지 않겠는가! 가게 문을 열어놓고는, 개척하려는 노력은 선반구석에다 밀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성작가가 됐다는 이름표를 향기 없는 조화의 장식품으로 딸랑거리면서 자기만취에 취해있는 사람들이 뉴욕에는 참 많다. 완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 배운 것을 전수하는 작업인데 아무에게도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 기분대로 짐작대로 가르치려 든다는 것은 후학들에게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문학이나 예술에 있어서는 배운 것에 새로운 것을 찾아 덧보태는 작업이라 가정에 족보가 있듯이 ‘누구의 문하생’ ‘어느 출신’이란 출신이력이 따라 다닌다.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어느 단체이던 간에 친목이란 명분이 상당부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예술이나 문학단체에서는 거기에다 사상의 개척, 미학의 개척, 표현의 개척 등이 치열하게 앞서 있어야 한다. 문학과 예술은 빈방에 홀로 앉아 몇 줄의 잡문이나 넋두리를 쓰는 것으로는 열매가 되지 않는다. 배우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완성이란 것이 없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진짜(?)문인 입니까?” 혹, 잡문이나 넋두리를 들고 “나는 시인이요, 나는 수필가요,” 떠드는 착각이 아닙니까? 문인이라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묻고 싶은 말이었다.

한국 본사에서 미국지사로 발령을 받고 온 어느 기자의 말, “문화부 기자로 미국에 와 보니 웬 시인이 그렇게 많고, 웬 수필가가 그렇게 많은지, 너도 시인, 나도 시인, 너도 수필가, 나도 수필가란다. 과연 이 사람들이 뭘 좀 아는 진짜 시인이고 진짜 수필가인지 의심이 가는데 어디
서 공부하고 누구한테 배웠는지 물으면 도무지 대답하는 자가 별로 없더라.”시인과 수필가란 돈벌이와는 만리 길이고 내놓을 만한 명함도 되지 못하는데 신분포장이란 착각에서 나는 시인이요, 나는 수필가요 떠드는 것일까?

공자의 말이 맞다. 어느 분야든 간에 배우지 않고 제대로 되는 분야는 별로 없다.배우고 노력하는 시인이나 수필가는 고통을 안고도 웃는다. 완성이 무엇인지를 알고 완성을 향해 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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