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 때문입니다”

2009-02-2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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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철 (목사·수필가)

인간은 선천적으로 남에게 책임 전가를 시킴으로써 자기 정당화를 주장하는 본능을 갖고 태어났다. 그 좋은 예를 성서의 첫머리에 나오는 (창세기) 범죄의 내용에서 볼 수 있다. 조물주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는 절대로 따먹지 말라고 엄금했는데 종당에는 아담과 하와가 이를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큰 죄를 범했고, 이에 대한 조물주의 문책에 대하여 이들은 법을 어긴 자신의 죄를 회개할 생각은 않고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기에 급급했다.

법을 어긴 최초의 하와는 뱀의 꾐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아담은 하와 때문이었다고 각각 자기가 범한 죄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면서 자기 정당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이들이 애당초 자기 자신의 죄책감에서 철저한 회개를 했더라면 인류의 운명은 아주 달라져 지금처럼 비참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인류의 시조로부터 시작된 책임 전가의 본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회악을 조성하고 복잡하게 뒤엉켜 인생을 괴롭히고 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이미 오래전 흘러간 유행가 가운데 ‘그건 너! 바로 너! 너 때문이야.’라는 가사가 있다. 인간의 책임전가 본능을 여실히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잘된 것은 내 탓이고, 잘못된 것은 조상 탓’으로 돌린다는 옛말이 생겨나기도 한 것이다. 이 잘못된 본능 때문에 정계, 종교계, 교육계를 막론하고 사회 전체가 진통을 겪어오고 있는 셈이다. 2월 25일은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인 ‘성회수요일(Ash Wednesday, 재를 무릅쓰고 통회하는 일)’이다. 해마다 있는 일이기에 그날이 무슨 날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다 부족하고 털어서 먼지 안날 사람이 없기에 구태여 종교를 믿는 신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부족과 잘못을 뉘우치며 가끔 자숙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성서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한 제자의 배신으로 인해 자신이 악당들의 손에 잡혀가 십자가에 처형될 것을 말했을 때 놀란 제자들은 스승이 당할 고난은 안중에도 없고 다만 그 배신자가 자신이 아니라고 발뺌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크건 작건 어떤 공동체 안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데 그 공동체 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범인이 내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다행스러워 어떻게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단 말인가! 설혹 내가 범인이 아니더라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공동책임이 있으며 따라서 다함께 죄책감을 가지고 마음 아파해야 옳을 일이다.

내가 아무리 양심적이고 의롭게 살아왔다고 해도 만일 우리 사회나 또는 우리 교회 안에 가롯 유다가 있다면 공동책임을 지고 함께 참회를 해야 옳다고 본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했거늘, 사회건 교회건 사방에 꼴뚜기들이 득실거리는 판국에 그것이 나의 책임이 아니라고 해서 나 혼자만이 성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이 자기는 아니라고 변명하기보다 오히려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
다고 생각하여 “주여, 내니이까?” 라는 말 대신에 “주여, 나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했더라면 일말의 양심 때문에 충격을 받아 가롯 유다도 통회 자복하고 스승을 배신하는 일을 중단했을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된다.

전체 분위기가 자기 정당화였기에 배신자 자신까지도 거기에 휩쓸려 같은 말을 지껄이는 웃지못할 촌극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 이후 크고 작은 일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내가 먼저 책임을 지는 마음을 갖는다면 인간 사회는 한결 밝고 화평한 공동체가 되리라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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