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다림의 미학

2009-02-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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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춘 (수필가)

공원의 벤치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일은 애틋하게 가슴 설레이는 일이다. 학교에 간 어린 자녀들의 귀가를 기다림은 부모의 애틋한 사랑이다. 회당에서 예배나, 미사나, 법회를 기다리는 시간은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을 추슬러 준다. 병동 입원환자의 기다림은 재활의 기쁨을 꿈꾸고 있다. 외출한 배우자를 집에서 기다림은 자동차 사고나 납치사고가 흔한 험악한 세상에서 걱정 반, 근심 반이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갓 난 아기의 부모는 아가의 백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징집으로 입대한 병정은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달력의 한 칸 한 칸을 메꾸어 간다. 영주권을 신청한 이민 대기자는 언젠가도 모를 그날을 정말 눈 빠지게 기다린다. 날을 받아 놓은 예비 신랑 신부는 그날을 생각하는 설레임 속에서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살이 가운데 손꼽아 기다리지 않는 꼭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이는 자기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자기가 언제까지나 죽지 않을 것이란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아니 생각하기조차 싫은 명제이기도 하다. 사형언도를 받은 사형수의 하루하루는 언젠가 찾아올지 모를 죽음의 공포 속에 한 순간, 한 시간, 하루의 일과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황금 보다 귀중한 삶의 끝자락이다.


그러기에 우리보다 인생을 앞서산 본 현인들은 후세의 우리들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여러 가지 학설과 문헌으로 가르쳐 주었다. 기왕에 주어진 한 백년 밖에도 못 살 인생이면, 조물주가 살아생전에 아프지 않고 짧은 인생 살게 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는 우리에게 병고(病苦)라는 멍에를 씌워 고생시키다 끝내는 우리를 천국이나 극락, 또는 지옥으로 데려간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병고에 힘든 인생을 돌보아 육신의 고통을 덜어주고, 어떤 질병의 경우 우리의 생명을 연장하여주는 의사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고 또 그들은 사회의 엘리트로 대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출생하자마자 그들로부터 예방주사를 맞아야하고, 평생토록 갖가지 질병을 상담 치료받아야 하며, 끝내는 생을 마감하고 나서도 사망진단서를 받아야 하는 마지막 절차도 그들의 신세를 져야 한다. 우리 사회에 한인 인구수에 비례해 의료업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인 의료인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은 영어가 불편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편리하고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사 사무실을 찾아가 때때로 느끼는 감정은 지루한 ‘기다림’이다. 한인이든, 타민족이든 어느 닥터 오피스이고 예약된 시간에 가면 30여분은 보통이고 좀 명성이 있다는 곳은 한 시간이상 기다리는 곳도 있다. 굳이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들추지 않더라도
한인 의사들만은 이제 더 이상 고통을 안고 찾아간 환자들에게 기다림의 고통은 안겨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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