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런 큰 별이 또 나올까?

2009-02-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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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김 수환 추기경이 별세하였다. 모든 신문이 그의 생애와 정신세계를 보도하였지만 나는 한 마디로 그를 ‘민족의 양심’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살던 군사독재 시대에도 그는 공석에서나 권력자와의 독대에서나 정의를 주장하고 굽힌 적이 없다. 아마도 그가 무사하게 천수(天壽)를 누린 것은 카톨릭이라는 막강한 세계적인 배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인은 많다. 그러나 용기 있는 지성은 드물다. 종교인은 많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종교인은 드물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딱 두 가지를 명하였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義)를 구하라.”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정의를 추구하라는 분부였다. 고 김 수환 추기경은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다. 목숨 걸고 정의를 외치는 이런 큰 별이 또 나올까?

조선총독부는 기미년 만세운동 직후 선교사 9명을 불러 간담회를 가졌다.(1919년 3월22일) 재발을 막기 위한 외국인들의 의견 탐사였다. 이 자리에서 마펫 선교사가 말했다. “조선인에게 있어서는 물질보다 중요한 것이 의(義)입니다. 굶어도 사람답게 대접 받고, 어른 대접 받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선교사들이 본 조선인 상은 가난해도 정의롭게 사는 것을 지고선(至高善)으로 알기 때문에 ‘잘 살게 해 주겠으니까 내 말을 따르라’는 식의 통치방법은 또 다른 만세운동을 부를 거라고 침략자들에게 일침을 놓은 것이다.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세대는 가고 도의의 세대가 오누나.”하고 독립선언문은 외쳤지만 그 후 90년이 지난 오늘 과연 한반도에 정의와 평화와 진실의 사회가 구축되었는가?


정의는 그 깊이에 있어서 세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동등한 정의(equitable justice)’로서 사람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사회정의이다. 이것이 좀 더 깊어지면 ‘분배되는 정의(distributive justice)’로서 부와 복지와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되는 사회정의로 발전한다. 여
기에서 더 깊이 들어가면 ‘보상의 정의(compensatory justice)’로서 지체부자유자나 정신장애자, 기타 사회와 나라의 도움이 없으면 혼자서는 사람답게 생존할 수 없는 시민을 온 국민이 협력하여 특별한 배려를 해주는 정의를 구현하는 사회이다.

정의니 평화니 하는 것은 나 같이 배운 것도 많지 않고 돈도 없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누구나 인류평화와 정의사회 건설에 공헌할 수 있다. 그것은 각자가 정의와 평화의 전도사가 되는 것이다. 정치가나 경제인이 아니더라도 사회의 악과 부조리, 인간을 괴롭히는 사태를 고발하면 된다. 그리고 “아무도 절망 앞에서 굴복하지 말라. 지금도 희망이 있다.”라는 메시지를 그대의 목청이 허락하는 한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위젤이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한 말이다.

정의로운 친구를 한 명 갖는 것이 부자 친구 열 명을 갖는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전자는 나를 명예롭게 할 것이고 후자는 나를 부끄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쫓는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고 구체적인 희생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십자가라는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다. 나를 소모시키는(불태우는) 정열이 없으면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의를 좇는 사람은 적을 수밖에 없다. 의인은 사자와 같이 담대해야 하기 때문이다.(잠언 28장1절) 똑같이 정의라고 번역되지만 영어의 righteousness 와 justice 는 구별된다. 후자는 정확하고 엄격한 의무를 요구하는 정의이다. 그러나 전자는 복지와 친절과 관용을 내포하는 정의이다. 성경에서 ‘예수의 의(義)’는 전자에 속하고 ‘바리새인의 의(義)’는 후자에 속한다.

토인비는 “문명의 흥망사는 지도자들의 정의에 대한 용기에 좌우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정의를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용감한 지도자들이 있을 때 인류의 문명이 흥성했고, 권력과 물질과 명예를 탐하는 이기적인 지도자들이 다스릴 때 문명이 쇠퇴하였다는 역사의 원리를 말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정의로운 용기는 사회 건설의 씨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만을 지키려는 ‘달팽이 인간’은 안전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이웃 전체를 불행하게 만든다. 유명한 성구에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순서를 바꾸면 신앙인이란 하나님과 정의로운 관계, 곧 바른 관계를 맺은 자를 가리킨다. 문제는 무엇이 정의인지를 어떻게 가리느냐 하는 것인데 기독교에서는 그 표준을 ‘성경’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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