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윷말이 된 어린이들

2009-02-1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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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미국에서도 음력 설 쇠는 모습이 다양해졌다. 한복, 세배, 떡국, 윷놀이...등이 널리 퍼지고 있다. 온 가족이 모여서 서로 인사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같이 놀며 새해를 맞이하는 고유의 풍습이 이어지고 있음은 다행이다. 이것이 한국 문화를 이 지역에 심는 방법이 아니겠는가.그런데 학교에서 매년 윷놀이를 하지만, 별로 재미있게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러다가 올해는 비약적인 생각이 나왔다. 윷놀이의 재미는 무엇인가. 여럿이 편을 갈라 놀 수 있다는 것이 첫째이다. 네 개의 윷짝을 던지는 재미다. 윷판에서 윷말을 옮기는 재미다. 이런 재미들을 제대로 살려보자는 것이 연구의 초점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어린이들이 그 재미를 느낄 수 없을까. 그들은 힘차게 윷을 던질 수 있다. 던진 윷짝 네 개가 엎어지고 잦혀진 상태에 따라 윷말들이 윷판 위를 여행한다는 이치를 이해한다. 그런데도 별로 재미없다는 얼굴들이었다. 생각 끝에 도달한 것은 전원이 윷판에서 움직이는 윷말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시골에서 멍석을 깔고 윷을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 여기서는 반대로 윷판을 크게 확대해 보자. 그래서 마루바닥에 매스킨 테이프로 가로 세로 3m쯤 되는 정사각형에 지름 15cm의 색지 동그라미를 테이프 위에 붙여서 윷판을 만들었다. 여기에 유치반 어린이들이 윷말이 되었다. 윷짝이 떨어지는 상태에 따라 어린이들이 윷판 위를 걸어가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백만불짜리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런 생각이 나왔는가. 분명한 목적이 있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이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생각은 생각을 낳는다’이다.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일상사라도 좀 더 생각하면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생각하는 습관을 어린이들에게 길러주고 싶다. 현재의 생활은 편리하다. 그래서 생각할 여유나 기회를 빼앗는다. 내 자신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다. 편리한 생활은 생각하는 힘을 약화시키는 시대를 만들었다. 구태여 내가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게 아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 놀라운 새로움을 얻게 된다. 기술을 연마하는 방법이 백번의 연습으로 이루는 것처럼, 생각하는 힘도 반복되는 연습으로 얻게 된다.

어린이들이 응얼거리며 말을 배우고 나면 ‘왜 시대’의 질문 공세가 시작된다. 이런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성의껏 대꾸를 해주면 좋다. 학문적인 답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왜냐는 질문에 대한 단순한 답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성장에 맞춰서 질문을 던진다. ‘왜 이게 좋아?’ ‘왜 이게 가지고 싶어?’ ‘왜 거기 가기 싫어?’ ‘왜 사달라고 해?’ ‘왜 그 친구가 좋아?’‘왜 그게 먹고 싶어?’ ‘왜 성이 났어?’...어린이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이쪽에서도 어린 이들에게 묻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질문을 주고받는 과정이 심각할 필요는 없다.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던지는 질문이라도 그들은 잠깐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습관은 가정에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식사하기, 학습하기, 목욕하기, 잠자기...등의 좋은 습관이 길러지는 것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되면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때나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다.

생각하는 일이 귀찮은 일일까. 생각하는 일이 쓸데없는 일일까. 그것이 아니다. ‘생각하는 일’이 습관이 되면 하나의 즐거운 일이 된다. 즐거운 일이 되는 이유는 생각의 결과는 유형 무형의 향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또 생각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달라지는 모습을 즐기게 된다. 얼마나 큰 소득인가. ‘생각하기’ 즉 사고력은 인간을 위대하게 형성할 수 있는 밑거름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그의 명상록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지 않았는가.

요즈음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창조적으로 생각하기’는 평범한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막연한 상상을 넘어서 창조적인 상상을 한다는 것이다. 창조적인 상상은 ‘생각하기’의 전진상태이며 누구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어린이가 윷말이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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