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징검다리

2009-02-1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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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는 좀처럼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개천이 흐르는 곳에는 으레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좁다란 개울물에는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도록 돌들을 놓아 밟고 건너갔다. 그러나 계곡이 진 곳은 통나무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걸쳐놓고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징검다리는 그래서 다리 받침대도 없이 손쉬운 대로 만들어놓은 통나무 걸침이거나 건너뛰는데 사용된 돌다리가 대부분이었다.

이같이 인생 안에도 건너뛰기가 쉽지 않은 어려움에 부딪히면 건너뛸 삶의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요즈음 같이 경기침체가 계속될 때는 어려움을 건너뛸 징검다리가 더욱 절실하다. 어렵다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때로 삶의 어려움이나 부족함마저도 징검다리고 이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좋은 예가 예수님 당시 세관장이었던 ‘자캐오’이다. 성서에 보면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밖에 나가보니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몰려온 관계로 예수님이 오시더라도 멀리서조차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캐오는 미리 일찍 나와 앞줄에 서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사람들에게 떳떳이 얼굴을 내밀 처지가 아니었기에 맨 나중에 조용히 나와 사람들 뒤에 서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키가 작은 그는 결국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에 체면도 가리지 않고 무작정 근처에 있는 뽕나무 위로 기어 올라간 것이다. 그날 예수님은 당신을 보기 위해 나무까지 올라간 자캐오의 적극적인 순수한 마음을 보시고 손수 그를 불러주신 것 아닐까? 이 순간 지금까지 하느님과 사람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인 취급을 받던 세관장 자캐오의 인생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만일 그 당시 자캐오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사는 위치였거나 혹시라도 떳떳이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는 처지였다면, 그래도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그처럼 나무 위에까지 기어 올라갈 수 있었을까? 아마도 세관장인 그는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올라갈 순수한 생각은 애당초부터 못했을 것 같다. 혹시 누가 알겠는가? 그도 율법학자들처럼 교만해져서 예수님을 얕잡아보고 핍박까지 하게 됐을지 말이다.

알고 보면 인간 마음처럼 변덕스러운 것은 없다. 몸살감기로 드러누워 끙끙 앓다보면 병만 나으면 무조건 행복할 것 같다가도,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그런 생각을 언제 했느냐는 듯이 딴 사람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소유하기만 하면 행복할 것 같다가도 막상 손에 쥐게 되면 어느새 감사를 잃어버리고 또 다른 것에 눈길을 빼앗겨 탐욕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인간이니, 이 얼마나 나약하고 비참한 존재란 말인가.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마저도 축복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로 만들어서 살 줄 아는 지혜가 꼭 필요할 것 같다. 많이 가져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고, 비록 적게 가져도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의 겸손함이 행복을 더 보장해 줌을 알기에 말이다.

소유했던 것을 잃어버린 사람은 상심도 크겠지만, 그것에 집착하다 보면 건강마저 상하기 쉽다. 그렇기에 옛사람들이 ‘재산을 잃으면 일부를 잃지만,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고 한 것 아닐까. 오히려 불경기 덕분에 가진 것을 살펴보면서 소중함을 발견하게 되고, 절약하는 습관을 배운다면 이 또한 복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될 것 아닌가! 그럴 때 비로소 평소 작게 보였던 것이 더욱 커 보여 감사할 줄 알게 된다.

김재동
<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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