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하는 삶- 친구

2009-02-0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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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껏 읽은 소설 중에 가장 여러 번 되읽은 것이 삼국지이다.

세상을 다 삼킬 듯 엄청난 홍수처럼 독자를 압도하다가 잔잔한 호숫가의 서정 가득한 시 구절로 어우러지는가 하면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로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다가 다시금 귓가에 소근 대는 지혜의 표현들이 이리저리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50권짜리 대하소설, 그 가운데서도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복사꽃 만발한 뒷동산에서 의를 맺는 장면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성격과 기질과 출신이 각각 다른 세 사람이 형제의 연을 맺기로 한 날, 그들은 이렇게 다짐한다. “비록 같은 날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죽기만은 같은 날이기를 바라오니 하늘이시여, 우리들의 뜻을 굽어 살피소서.”


그들 셋이 요새 세상에 태어나 교회를 다녔더라면 이렇게 기도했을지 모른다. “주님, 우리가 태어난 날은 각각이오나 세상에서 맡은 사명 잘 감당하다가 주님 나라 가기 원하오니 우리들을 같은 날에 불러주시옵소서.”

미국에는 많은 친지들이 살고 있다. 출장으로 잠시 다녀간 것도 아니고 지사 파견근무로 몇 해를 지내다 가는 것도 아니고 나처럼 LA가, 혹은 뉴욕이 고향이 된 친구들이다. 이민으로, 유학으로, 비즈니스로, 이민 온 이유는 각각이지만 20~30대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중요한 시절 대부분을 미국 땅에서 어울려 살고 있다. 나이가 더할수록 친구가 소중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고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한국에서 산 날보다 미국에서 산 날이 더 길어졌다. 부모를 떠나고, 익숙한 말과 익숙한 문화를 떠나와 새롭게 적응하는 그 시절 동안 누구나 외로웠겠지만 그래도 아주 힘들 때마다 내 옆에는 친구가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친구에 관하여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지켜온 말이 있다. ‘좋은 친구를 만드는 데는 3년이 걸리지만 친구를 잃는 데는 3분도 걸리지 않는다.’ 충실한 친구로 남으려면 관계를 가꾸어 나가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친구는 자석 같다. 주변에 사람이 여럿 있어도 그 중에 특별히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같은 신앙을 가진 친구,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진 친구, 헤어져 있을 때에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친구, 진짜 기도 제목을 말해도 좋은 친구…. 이런 친구들과 복숭아꽃 뒷동산의 연을 맺고 사는 그런 삶을 나는 가장 복 받은 삶이라 여긴다.

때로는 기도 제목을 솔직하게 나누는 일이 쉽지 않다. 그것이야말로 나를 송두리째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삼국지의 세 사나이는 황건적에 대항하여 세상을 건질 동지로 만났지만 나는 진짜 기도 제목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동지를 진정한 친구로 만나고 싶다.

함석헌 선생의 시를 빌어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하고 누군가 물어올 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그것은 잘 산 인생이 될 것 같다.

김범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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