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복음 이야기- 너무도 낯선 죽음, 그 ‘실화’

2009-01-2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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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비행기가 날아가다가…’

비행기를 탈 때마다 들곤 하는 생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뉴욕 상공에서 새떼가 비행기 엔진에 말려들어 대형 추락사고가 날 뻔했다. 이제 탑승시 ‘챙겨 둘’ 염려 항목이 하나 더 늘었다. 새떼의 충돌력이 총격과 맞먹는다니 더욱 심상찮다.

지진은 어떤가. 당신이 지금 LA 윌셔 가의 고층빌딩에서 일한다고 해보자. 갑자기 빌딩이 좌우로 흔들리고 바닥이 둘둘거린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한꺼번에 엘리베이터로 몰려든다. 당신도 황급히 비상계단으로 몸을 던진다. 이유는 단 하나, 왠지 죽음이 낯설어서다.


나는 오랫동안 죽음을 믿지 못했다. 나의 이 정신, 말짱한 이 감각이 어느 날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흙속에 묻히는 순간 구더기들이 스멀거리며 무례하게도 나를 마구 먹어댈 수 있나. 억울해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세상’을 상대로 누가 벌써 소송이라도 걸었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러나 내 삶에 죽음을 실감케 한 사건이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 4학년일 때 지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당시 서울 하숙집 주인의 느닷없는 부고에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는 말을 처음 온 몸으로 절감했다.

아버지는 복음을 모르셨다.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얼마나 마음이 무겁고 아프던지. 아버지의 시신이 영정 뒤로 운구차에 실리는 순간, 내 육신의 깊은 어느 한 부분이 잘려나가는 것 같았다. 결코 나뉠 수 없는 어떤 덩어리가 억지로 떼어져 땅바닥에 딱 붙어버리는 것 같았다.

장지까지 가는 길의 버스 안에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목놓아 크게 울었다. ‘아버지의 영혼을 영원히 잃었구나…’ 하늘이 내려 앉아 내 가슴을 꽉 죄어 왔다. 내 속의 어디서 그렇게 큰 슬픔의 멍울이 한없이 꾸역꾸역 올라오던지.

그 후로 내가 발견한 것이 있다. 죽은 사람은 다시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두 번 다시는 이 땅에서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동안 길을 가다가도 문득 이 사실이 실감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이 땅에서 살 것처럼 거리를 활보하며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도 무심해 보였다. ‘직립보행’하는 그들의 두 다리가 벼랑 끝을 걷는 듯 간당간당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나는 대학시절 이런 짤막한 시를 써 둔 적이 있다. ‘내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죽어 버린다면/ 끝내 빛을 듣지 못하고/ 불쌍하게 죽어갔다면/ 나는 그때부터/ 백수건달을 뒤집어쓰고/ 온 천지를 미친 듯/ 떠돌아다닐 것만 같습니다.’


훗날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답을 주셨다. “세상에는 지금도 네 가족 외의 수많은 귀중한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소개받지 못한 채 죽어 간다. 네 아버지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것과 똑같은 심정으로 나를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해다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의 문제만큼은 가장 먼저 꼭 풀어 놓고 살아야 한다. 죽고 나서는 너무 늦다.

산 자들 가운데 죽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고, 죽은 뒤에 죽음의 문턱을 되돌아설 사람이 없다. 죽음을 미리 대비하는 것이 참된 지혜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the house of pleasure)에 있느니라.’(전 7:4)

안환균
<남가주사랑의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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